[경제 히스토리] ‘造船의 왕’ 코리아… 불황에 갇혀 슬픈 1위

입력 2015-06-26 03:22
한국은 여전히 세계 제1위의 조선국가다. 영국의 조선·해운 분석기관인 클락슨 자료에 따르면 올 1∼5월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은 990만CGT(표준환산톤수·건조 난이도 등을 고려한 선박의 무게)이며, 한국의 수주량은 433만CGT로 1위였다. 전 세계 수주량의 절반 정도를 한국이 차지했다. 일본이 223만CGT로 2위, 중국은 195만CGT로 3위였다. 한국은 지난 1월에만 일본에 1위 자리를 내줬을 뿐 지난해 10월부터 계속 월별 수주 실적 1위다.

◇슬픈 1위=그런데 기쁜 1위가 아니라 ‘슬픈 1위’다. 1∼5월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은 2014년 1∼5월에 비해 42.2% 수준에 불과하다. 조선업계 내부에서는 “전 세계적인 경제 침체 때문에 발주량이 예년에 비해 3분의 1 수준”이라고 말했다. 5월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은 41척(166만CGT)이었는데, 전 세계 선박 발주량이 50척 미만인 것인 2009년 5월(18척) 이후 6년 만의 일이다. 조선 1위국이라고 좋아할 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한국 조선업체들은 지난해 11월 이후 7개월 동안 단 한 건의 해양 플랜트도 수주하지 못했다. 국제유가가 급락하면서 대형 석유회사들이 발주를 미뤘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조선 빅3’가 몇 년 전부터 고부가가치산업인 해양플랜트에 주력해왔지만, 저유가로 발주 자체가 끊겼다. 현재 유가는 배럴당 50∼60달러 선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25일 “해양 플랜트가 발주되려면 국제 유가가 최소 배럴당 80달러는 돼야한다”고 설명했다.

◇나빠진 실적=빅3의 지난 1분기 실적은 좋지 않았다. 삼성중공업을 제외한 2개사가 1분기 적자를 기록했다. 저가 수주 물량을 계속 생산해야 하는데다 해양플랜트 부문 손실이 지속됐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은 인력 구조조정 비용 등이 반영돼 지난 1분기 1924억원의 영업 손실을 기록했다. 대우조선해양도 지난 1분기 433억원의 영업 손실을 입었다. 대우조선해양이 분기 기준 영업 손실을 기록한 것은 2006년 3분기 이후 8년 만이다. 삼성중공업은 지난 1분기 전년대비 흑자 전환, 263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지만 지난해 2분기 이후 영업이익 폭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 그나마 대형 조선업체들은 버티고 있지만, 성동조선해양, STX조선해양 등 중소형 조선업체들은 유동성 위기 장기화로 생존의 기로를 넘나들고 있다는 평가다.

조선업 침체와 불황 속에서도 한국 조선의 수주는 계속됐다. 이달 들어 현대중공업은 노르웨이 선사와 LNG FSRU(부유식 액화천연가스 저장·재기화 설비) 1척 건조 계약을 맺었고, 대우조선해양은 AP몰러 머스크로부터 18억 달러(1조9800억원) 규모의 대형 컨테이너선 11척 수주를 따냈다. 삼성중공업은 미국 선사와 3700억원 규모의 셔틀탱커 3척 계약을 체결했다. 한국이 상대적 강세를 보이는 초대형 컨테이너선, VLCC(초대형 유조선), LNG선은 올 들어서도 발주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조선3사는 체질 개선 중=조선 3사는 각각 사업 정리, 인력 구조조정 등 체질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지금 경쟁력을 높여야 다시 호황기가 찾아오면 이를 낚아챌 수 있다”며 “조선업계에서 진행되는 체질개선이 중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9월 권오갑 사장 취임 이후 위기경영을 선언하고 인력 구조조정과 조직 개편을 계속해왔다. 임원 30%를 정리했고, 1500여명의 직원들을 명퇴시켰다. 성과주의 연봉제를 도입하고, 현대중공업·미포조선·현대삼호중공업 등 계열3사의 영업조직을 통합하는 등 사업부서 통폐합 등을 단행했다. 대우조선해양은 정성립 사장의 취임과 동시에 구조조정을 시작하는 분위기다. 구체적인 방안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부실 자회사 정리, 불필요한 자산 매각 등 꽤 심각한 내용들이 포함될 전망이다. 다음달 초 조직개편에 이어 사업구조 재편도 준비하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올해의 목표가 ‘생존을 위한 질적 경쟁력 강화’다. 조선업계가 어려운 만큼 생존이 목표라는 의미다. 삼성중공업은 이미 지난해 12월 조직개편을 통해 사업무별 책임경영을 강화하고, 대형 해양 프로젝트 대응능력을 높일 수 있도록 조직을 재정비한 상태다. 또 조선업체들의 영업 이익을 떨어뜨렸던 저가 수주 경쟁을 자제하자는 공감대도 조선업계 내부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이 신성장 동력사업으로 주목했던 풍력사업에서도 철수 내지는 사업을 축소하는 분위기다.

◇불황 터널의 끝은 언제쯤=조선업계에서는 불황이 올 하반기까지는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고 있다. 국제유가가 당장 오를 가능성이 높지 않은 데다 해운경기 상승세를 기대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해양플랜트 시장의 회복 가능성이 없고 에코십 투자수요까지 위축돼 올해 내내 조선업은 어려운 상황이 계속될 전망”이라고 예상했다. 결국 유가가 오르고 세계 경제가 침체 국면에서 벗어나야 조선업계가 불황의 터널을 빠져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지만, 그 시기를 예상하긴 힘들다. 게다가 조선업 경기가 살아나더라도 중국과 일본의 견제를 이겨내야 한다는 또 다른 과제가 남아 있다. 최근 일본 조선업계는 엔저로 인해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공격적인 수주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급격히 외형을 키웠던 중국 조선업계 역시 일시적인 수주 부진을 겪고 있지만, 현재 대형조선사를 중심으로 일종의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고 있어 몇 년 뒤에는 한국 조선업체와 겨룰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엔저의 효과를 보고 있는 일본 조선업계의 기술력과 가격경쟁력을 무기로 한 중국 조선업체 사이에 끼어있는 한국 조선업체들이 살아날 길은 결국 경쟁력 강화밖에 없다”고 말했다.

남도영 기자 dy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