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 사태 똑바로 보자] 대형 병원 의존 실태… 1∼3차 병원 역할 분담 모호, 동네 병원 불신도 한몫

입력 2015-06-25 02:02
우리나라의 환자들은 대형병원을 선호한다. 동네병원 몇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눈에 띄게 호전되지 않으면 곧바로 상급종합병원을 찾는다. 이런 ‘의료 쇼핑’은 1∼3차 병원의 역할 분담이 무의미한 의료체계에 원인이 있다. 지역별로 믿고 찾을 수 있는 거점병원이 드문 상황과 1차 의료기관인 동네 의원에 대한 의료 소비자들의 불신이 맞물려 의료 쇼핑은 보편화됐다.

◇‘강요된’ 의료 쇼핑=지난해 8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간한 ‘한국의료전달체계의 쟁점과 발전방향’ 보고서는 2006년과 2013년의 의료기관당 연간 평균 진료비를 비교·분석했다. ‘빅 5’ 상급종합병원은 7년 새 102.5% 증가한 반면, 동네 의원은 31.8% 늘어나는 데 그쳤다. ‘빅 5’에는 서울아산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서울성모병원이 꼽힌다.

환자들이 대형병원에 의존하는 문화는 의사에 대한 신뢰보다 병원에 대한 신뢰가 높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의료업계 분위기에서 비롯된다. 환자들이 거대한 건물과 조직을 갖춘 대형 병원의 이미지 자체를 믿고 있다는 것이다. 병원 홍보에는 각 분야의 ‘스타 명의’들이 총동원된다. 의료 기술력이 눈에 띄게 차이나지 않더라도 환자들이 점점 대형병원으로 몰리게 되는 이유다.

주부 김모(31)씨는 “동네 의원에선 의사들이 청진기를 대거나 눈으로 확인하는 등 기본적인 진료 외에 구체적인 검사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며 “대형병원은 분야도 세분화돼 있고 유명 의사들이 많기 때문에 치료법이 다양할 것 같아 간다”고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의료의 질 측면에서 병원 간 차이가 크지 않다고 지적한다. 윤강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박사는 “의료체계에 대해서는 어디가 더 우수한지 판단할 수 없다”며 “각자에게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환자가 우겨서 3차 의료기관에 갔더라도 다시 1차 의원으로 돌려보내는 재의뢰가 활성화되지 않는 것 역시 의료전달체계의 혼선을 부추긴다. 의료계에선 “건강보험 수가가 너무 낮아 상급종합병원도 환자를 많이 봐야 수지를 맞출 수 있기 때문에 환자를 돌려보내는 일은 거의 없다”고 지적한다.

◇기형적인 대형병원 의존 실태=서울 강남구 역삼동에서 하지정맥류 전문클리닉을 운영하는 의사 A씨는 지난 4월 20대 환자 B씨와 상담을 한 뒤 황당한 일을 겪었다. 초음파 검사 후 수술 일정까지 조율 중이던 B씨가 1주일 뒤 병원에 전화를 걸어 “대학병원으로 가려고 하니 진료의뢰서를 끊어 달라”고 주장했다. A의사는 “대형 병원 진료가 필요하다고 의사가 판단했을 때 가능하다”며 거절했다. 얼마 후 환자의 보호자인 남성 C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다짜고짜 고함을 지르면서 “왜 진료의뢰서를 끊어주지 않느냐”며 욕설을 퍼붓고 협박했다. A의사는 경찰에 두 사람을 신고했다. B씨와 C씨의 사과로 사건은 마무리됐다.

이 일을 겪은 A의사는 환자가 원할 때마다 진료의뢰서를 모두 써줘야 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보건복지부에 해석을 의뢰하자 ‘진료의뢰서 발급은 의사의 고유권한이며 순전히 의사의 판단에 따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A의사는 “환자들은 1차 의료기관을 3차 의료기관으로 가기 위한 디딤돌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서 정형외과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의사 D씨는 한 달에 4∼5명 정도 진료의뢰서를 요구받는다. 심지어 대학병원을 미리 예약해놓고 의뢰서를 써달라는 환자도 있다. D의사는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상 1, 2 ,3차 병원 분류는 의미가 없다. 환자들은 이 병원 저 병원을 쇼핑하듯이 다닌다”고 했다.

현실이 이런데도 의료체계를 정리하려는 정부의 노력이나 제도 개선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윤 박사는 “환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동네 의원에서부터 상급종합병원까지 이용하는 데 아무 제약이 없다”며 “KTX 등 교통수단의 발달로 ‘빅 5’ 병원을 오가는 데 어려움이 줄어든 것도 메르스 확산의 한 이유”라고 분석했다.

◇왜 삼성서울병원이었나=삼성서울병원은 24일 현재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확진자가 84명이나 나오고 의료 종사자 중 12명이 감염되는 등 이번 메르스 사태의 원흉으로 지목됐다. 병원의 산업적 측면만이 강조되고 수익성 위주로 경영되면서 메르스 확산에 불을 붙였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삼성병원은 철저히 산업 마인드로 운영하기 때문에 경영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이라면서 “메르스 관련 조치가 빠르게 이뤄지지 않았던 것은 수익성을 계산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K대학병원 3년차 레지던트는 “투자하는 만큼 다양한 연구가 이뤄지고 치료법이 먼저 도입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지나친 기업적 성향으로 ‘돈’이 나오지 않는 분야에 대해서는 냉정한 것이 사실”이라며 “의료를 서비스업으로 본다는 측면에서 보면 메르스 사태는 삼성서울병원에 관심 분야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가정의학과 전문의는 “우리나라 대형병원이 갖는 의료 수급 체계상의 문제 때문에 대형병원에 환자가 몰려서 메르스 사태를 악화시킨 것”이라며 “어느 대형병원에서라도 충분히 터질 수 있는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김미나 고승혁 홍석호 기자 min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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