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1134423'. 경안서림 대표로 한국고서연구회 회장을 지낸 김시한(84·서울 동원교회) 장로의 특별한 군번이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6·25전쟁 발발 3개월 뒤 피란지 부산에서 징집돼 일본에서 한 달여 훈련을 받고 미3사단 소속으로 참전했다. 대한민국 첫 '카투사'(KATUSA)인 셈이다.
카투사는 6·25전쟁 초기인 1950년 하반기 미군이 병력보충을 위해 징집한 한국군이다. 당시 카투사는 ‘K’로 시작되는 군번을 받았다. 카투사 대원들은 인천 및 원산 상륙작전과 장진호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미군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24일 서울 청계천 고(古)서점에서 만난 김 장로는 당시 앨범을 손으로 짚어가며 설명했다. 표지에 3사단이라고 인쇄된 앨범과 자료집에는 6·25전쟁에 참여한 미군의 전투모습과 생활내역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그는 미군 병사들과 함께 들판에서 부활절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전쟁 동안에는 들판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는 날이 많았다. 익숙하지 않은 영어로 설교를 듣고 찬송을 불렀지만 은혜가 넘쳤다.
“언제 포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긴장을 늦출 수 없었지만, 늘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지켜주심도 기도의 힘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는 생사를 넘나드는 군 생활을 통해 ‘주일성수와 기도생활’ ‘금주와 금연’ ‘법과 질서와 시간약속 지키기’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간증했다.
신앙심 깊은 미군들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이들은 용감하고 헌신적이었으며 한국에 우호적이었다. 한국문화를 소개해달라는 미군 병사에겐 우리 민요인 ‘아리랑’을 가르쳐 주곤 했다. 특히 미군 장교들과 군목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무를 완수할 정도로 책임의식이 강했다. 함께 근무했던 군목은 적의 총탄에 맞아 부상을 입었는데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전선을 돌며 예배를 인도했다.
“저와 함께 근무했던 미군들은 한국을 위해 그토록 힘든 전투를 하면서도 한 차례도 한국을 비하하거나 싫은 내색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우호적인 자세로 전쟁에 적극 임했지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가 들려준 6·25전쟁 참전기는 한 편의 영화처럼 극적이었다. 경계근무를 서고 돌아오다 지뢰를 밟았지만, 다행히 파편이 종아리만 살짝 스쳐지나가 목숨을 구했다. 함께 있던 동료 병사는 목에 파편을 맞아 긴급 후송됐다. 타고 가던 차의 브레이크가 파열돼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죽을 뻔한 위기도 겪었다. 휴전 하루 전날에도 적군과 교전을 벌였다.
“수없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살아남았습니다. 제가 살던 마을에서 군에 간 청년이 4명인데 둘은 전사하고 1명은 다치고 저만 멀쩡하게 제대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만 62년이 가까워 오지만 아직도 긴박하고 처절했던 전장의 기억들이 생생합니다.”
그는 얼마 전 흥행한 영화 ‘국제시장’에서 흥남철수를 한 날이 1950년 12월 23일로 나왔지만 사실은 이튿날인 24일 오후라고 정정했다. 그의 부대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철수가 결정되자 흥남부두에서 군함으로 남하하는 작전을 세웠다. 이때 피란민 후송 작전도 그의 부대가 맡았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항구를 빠져 나오면서 흥남부두를 향해 함포사격을 퍼부었습니다. 당시 부두는 미처 승선하지 못한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참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다음세대를 위한 충고를 잊지 않았다. “6·25전쟁으로 당시 인구 3000만명 중 약 1000만명이 이산가족이 됐습니다. 카투사도 4만3000여명이 참전해 1만4000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실종됐습니다. 다시는 이처럼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됩니다. 나라가 있어야 교회도 있습니다. 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평화통일을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미션&피플] 국내 첫 카투사로 한국전쟁 참전 김시한 장로 “6·25전쟁 死線에서도 주일엔 미군과 예배”
입력 2015-06-25 0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