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노석철] 순창 블루베리가 무슨 죄라고

입력 2015-06-25 00:51

‘고추장의 고장’으로 알려진 전북 순창은 블루베리 산지로도 유명하다. 농약을 전혀 치지 않고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하는 블루베리는 고추장에 버금가는 순창의 농산물이다. 순창군은 무농약으로 블루베리를 재배하는 농장 이름과 대표자 사진, 전화번호까지 별도 홈페이지를 통해 소개하고 있다. 오디 복분자 오미자 등도 순창의 주요 농산품이다. 순창은 전주에서 60㎞, 광주에서 40㎞, 남원과는 30㎞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무공해 지역이란 게 자랑거리인 고장이다. 게다가 전국 최고의 장수마을이기도 하다.

순창군은 ‘곳곳의 계곡에 흐르는 맑고 깨끗한 물과 수려한 산야는 한 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고 군을 소개하고 있다. 이런 조용한 산골 마을이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로 ‘메르스 마을’이란 오명을 뒤집어썼다. 메르스 환자 1명이 지나간 마을이란 이유로 여기서 생산되는 블루베리 등 농산품 주문도 확 줄었다고 한다. 게다가 순창이란 로고가 있으면 판매대에서 반품을 하는 경우까지 있다고 주민들은 하소연한다. 그나마 주문을 하는 고객 중에는 “주소지에 순창이라고 적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씁쓸하다.

메르스 감염의 진원지로 꼽힌 평택 농산물도 직격탄을 맞았다. 메르스 때문에 모임이나 회식, 야유회 등이 취소되면서 농산물 소비가 줄어드는 건 이해되지만 메르스 환자가 있다는 이유로 현지 농산물을 먹지 않겠다는 건 납득이 잘 안된다.

도대체 들판에서 나는 블루베리, 복분자, 오미자가 메르스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가. 블루베리가 응급실을 들락거리는 것도 아니고, 농장 근처에 메르스 지정 병원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억지로 걱정거리를 만들어내는 건 아닌가. 혹시 메르스 감염 우려가 있는 사람이 블루베리를 수확하면서 만질 수 있다고 걱정해서일까. 극장이나 공연장 등 대중이 모이는 장소를 꺼리는 건 이해가 되지만 먹는 것까지 메르스와 연결시키는 건 분명 정상이 아니다.

다만 블루베리의 수난에서 메르스에 대한 공포감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심각한 ‘신뢰의 붕괴’가 느껴진다. ‘뭔지 모르지만 다 못 믿겠다. 다 싫다’는 집단심리가 깊이 뿌리내린 게 아닌가 싶다.

더 따져들어가면 ‘국가가 최소한 우리의 안전은 지켜줄 것’이란 믿음이 깨진 이유도 깔려 있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뒤 그렇게 국민안전을 다짐했는데 불과 1년여 만에 대한민국이 메르스에 어이없이 당했다. 국무총리는 불명예 퇴진으로 공석이고, 재난안전 총괄 기관이라던 국민안전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전혀 못했다. 연금 전문가인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허둥대다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러니 현 정부에서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각 부처 장관들이 갈피를 못 잡으면 청와대와 대통령이라도 사안을 꽉 틀어쥐고 컨트롤했어야 하는데 그런 모습도 없었다. 청와대 홍보수석실은 국민의 눈높이를 느끼지 못하고 대통령만 바라보는 홍보 전략을 쓰다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정부 시스템 전체가 뒤죽박죽이니 ‘안전은 국가가 지켜주는 게 아니라 국민 각자의 책임’이란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메르스 사태 이후도 걱정이다. 이미 우리 정부와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신뢰도 붕괴됐다. 국민들이 정부 발표를 믿지 못하고 유언비어나 괴담에 흔들리는데 국정운영이 제대로 될지, 정부가 무너진 신뢰를 회복시킬 능력이 있을지 걱정된다. 만약 또 다시 재난 대응에 실패하면 속된 말로 ‘삼세번’이다. 그땐 국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생각하기도 싫다.

노석철 사회2부장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