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 때문에 못 온다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전 국민이 감염 공포에 떨 때 중국 권력 3위가 메르스를 뚫고 날아왔다. 우리 국회의장에 해당되는 장더장(張德江)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이 지난 11일부터 3일간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2003년 전임 우방궈 상무위원장 이래 12년 만이다. 그는 광둥성 당서기로 있던 2002년 11월 중국을 발칵 뒤집었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사건의 한가운데 있었다. 전염병이라면 손사래를 쳤을 법한 그가 한국에 왔다.
그의 방한은 몇 가지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진다. 첫째, 혐한(嫌韓) 분위기가 완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메르스로 인해 중국인 관광객이 대폭 줄어들고 한국인 의심환자가 중국 체류 중 확진 판정을 받아 중국에서 한국정부의 방역 실패에 따른 반한 감정이 확산되는 시점에 왔다. 그의 방문이 ‘한국은 안심할 수 있는 곳’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기를 기대한다. 둘째, 그가 수장으로 있는 전인대는 양국 관계의 발전에 유용한 법제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자유무역협정(FTA)과 육·해상 신실크로드인 일대일로(一帶一路)에서 한국의 지분을 인정하고, 양국의 지속적 발전을 측면 지원하기 위한 국회 간 소통 채널을 구축했다.
셋째, ‘빛 샐 틈 없는’ 한·미동맹에 비해 불안해 보였던 한·중 관계를 ‘물 샐 틈 없는’ 관계로 만드는 데 일조할 것이다. 그의 방한은 양국의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확고히 하는 상징적인 이정표로서 양국의 동반자 관계가 단순한 구호가 아님을 전 세계에 알렸다. 넷째, 그는 북한통이었지만 이번 방문으로 한반도통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북한 김일성대학에서 유학하고 옌볜 조선족자치주 당서기를 역임했다. 감성적으로 북한에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시진핑 국가주석처럼 취임 후 북한보다 한국을 먼저 찾았다. 그는 북한 핵무기 개발을 반대했고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통일은 큰 추세라고 했다. 북한에 대한 그의 감성은 이번 방문으로 한국에 대한 이성과 결합해 균형감 있게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다섯째, 시 주석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배려가 읽힌다. 장 상무위원장의 방한 약속을 그대로 이행해 양국 지도자 간 신뢰를 재확인했다. 메르스로 예정된 미국 방문까지 연기해야 했던 박 대통령에게는 천군만마 격이다. 그는 한국 국민이 박 대통령의 지도 아래 반드시 메르스를 극복할 것으로 믿는다고 확신을 주기도 했다. 여섯째, 한·중 관계를 안정적으로 가져가려는 중국의 의지가 엿보인다. 중국에 한국은 친성혜용(親誠慧容) 지역외교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다. 그의 방한 기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THAAD) 관련 보도가 없었다는 점에서 중국의 전략적 신중함이 느껴진다. 사드 논란은 지난 3월 새누리당 지도부가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재점화됐다. 사드 문제가 부각되면 국내외 여론이 다시 들끓게 돼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한다면 자칫 그 결정이 중국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내려질 가능성도 있다. 중국의 무(無)반응, 또는 최소한의 대응이 사드 논란 확산을 방지할 수 있다. 장 상무위원장은 관계 악화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으려 조심스러운 행보를 했다.
하지만 부담도 생겼다. 오는 9월 3일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행사 참석 요청을 박 대통령이 거부하기 어렵게 됐다. 박 대통령의 큰 외교 업적 가운데 하나가 한·중 관계 발전이다. 물론 전통적 우방인 미국과 일본에 대한 부담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장 상무위원장이 ‘메르스’라는 위험을 뚫고 한국에 왔듯이 박 대통령도 복잡한 ‘안보 메르스’를 뚫고 베이징으로 날아가야 할 것 같다.
황재호 한국외대 국제학부 교수
[시사풍향계-황재호] 메르스를 뚫은 한·중 관계
입력 2015-06-25 0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