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2차대전을 소재로 다룬 영화였나 보다. 출전을 앞둔 미군들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프로야구 중계방송에 귀 기울이며 열광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뉴욕 양키스 팬인 한 병사는 경기에 이기자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열띤 환호를 보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전쟁터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일부 전쟁사학자들은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 승패가 프로야구 때문에 갈렸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펴기도 한다. 전쟁 중 미국은 프로야구 리그를 계속 펼친 데 비해 일본은 중단시켰다. 영화 이야기처럼 미군은 살벌한 전쟁터에서도 야구 중계를 통해 고향 팀 소식을 듣고, 전쟁의 고통에서 일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곧 군의 사기에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스포츠는 이처럼 사회 통합과 국민행복 전도사로 큰 힘을 발휘한다. 그 힘은 즐거운 순간뿐 아니라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우리는 전쟁만큼 힘들었던 국가적 위기 때 스포츠가 보여준 위대한 힘을 알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 당시 미국에서 전해온 박찬호, 박세리의 승전보에 국민들이 시름을 잊어버리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혈혈단신 세계 최고의 스포츠 무대에 뛰어든 이들은 최선을 다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무한한 감동과 함께 국가적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고취시켰다. 특히 1998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메이저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가 보여준 ‘맨발 투혼’은 많은 이들의 뇌리에 오랫동안 남았다. 흑백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양말 벗은 발에서 그가 겪었던 고난의 시간을 읽어내고는 우리네 고통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공감할 수 있었다.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메르스 사태로 새로운 국가적 위기가 닥친 요즘, 여전히 스포츠는 국민 공통의 치유제로 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박세리의 맨발 투혼을 보고 골프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박인비가 최근 메이저대회인 KPMG 위민스 PGA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세계랭킹 1위를 되찾은 소식은 국민들에게 또다시 희망과 청량제를 던져줬다. 또 여자축구는 비록 프랑스와의 16강전에서 패했지만 여자월드컵 두 번째 출전 만에 첫 승과 16강 진출이란 목표를 달성했다. 프로팀이 7개밖에 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에서 태극낭자들이 보여준 투혼은 메르스로 신음하는 환자와 가족, 그리고 자가격리된 수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불꽃을 쏘아 올렸다.
그런 점에서 최근 감염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프로골프 등 주류 스포츠 경기가 일정상 차질 없이 치러진 점은 국가위기 탈출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비록 관중은 절반 가까이 줄어들어 관람석은 위축됐지만 그라운드의 열기는 메르스의 공포를 무색케 했다. 만약 감염을 우려해 이들 경기를 연기했다면 메르스의 공포는 실제 이상으로 더욱 확대 재생산됐을 것이다. 지난 주말을 기점으로 집에 갇혔던 사람들이 조금씩 바깥으로 나와 정상적인 휴일을 보낸 것은 다행스러워 보인다. 인천 베어즈베스트 청라골프장에서 열린 기아자동차 한국여자오픈 마지막 날에는 역대 최고인 1만8000명의 갤러리가 몰려 성황을 이룬 것이 좋은 예다.
국가적 위기는 잊을 만하면 다시 찾아온다. 역사의 숙명이다. 건전한 스포츠 육성은 국가위기 때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정치도 경제도 섣불리 해낼 수 없는 치유와 희망 같은 역할이다. 2차대전 때 프로야구가 미국의 승리를 이끈 것처럼 우리도 스포츠와 함께 메르스 위기를 극복해내길 기대해본다.
서완석 체육전문기자 wssuh@kmib.co.kr
[돋을새김-서완석] 국가위기 상황과 스포츠의 힘
입력 2015-06-23 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