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교회총격 유족들, 증오에 용서로 대답하다

입력 2015-06-22 03:11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교회에서 총기 난사로 흑인 9명을 숨지게 한 범인인 딜런 루프가 총과 ‘남부연합기’를 들고 있는 모습(왼쪽 사진). 남부연합기는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도를 찬성한 쪽인 남부연합 정부의 깃발이다. 미 50개주 가운데 사우스캐롤라이나주만 유일하게 이 깃발을 주의사당 경내에서 지금까지 게양해 왔다. 시민들이 지난 20일(현지시간) 주의사당 앞에서 남부연합기를 내릴 것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많은 이들이 너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은 너를 용서할 것이고 나도 너를 용서한다.”

백인 청년의 총기 난사로 희생된 흑인들의 가족이 보여준 화해와 용서의 정신이 미국인들을 숙연하게 하고 있다.

미국 흑인교회 총기 난사 사건 피의자 딜런 루프(21)의 보석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약식재판이 19일(현지시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노스찰스턴 법원에서 열렸다. 루프는 노스찰스턴 카운티의 구치소에 감금된 채 화상으로 재판을 받았다.

유족들은 가해자에게 직접 얘기할 시간을 주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관례에 따라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화면으로 보이는 루프에게 말을 건넸다.

당시 교회에서 함께 있던 아들을 잃은 펠리시아 샌더스는 “내 몸에 있는 살 오라기 하나하나가 모두 아프고 나는 예전처럼 살아가지 못하겠지만 하나님께서 너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희생자 미라 톰슨의 유족인 앤서니 톰슨은 “나는 너를 용서하고 우리 가족도 너를 용서한다”고 했다. 톰슨은 “네가 우리의 용서를 참회의 기회로 삼아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월스트리트저널(WJ)은 “재판 현장이 화합과 치유의 생생한 증언장이 됐다”고 전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트위터에 “희생자 가족의 반응 속에 미국인의 선량함이 묻어나온다. 끔찍한 비극의 한가운데에서도 품위와 선량함이 빛난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한 이매뉴얼 감리교회에서는 21일 사건 이후 첫 예배가 열렸다. 목회자들은 “기도만이 모든 것을 바꿔놓을 것”이라며 슬픔을 기도로 극복하자고 호소했다.

한편 미국 언론들은 루프가 만든 것으로 보이는 ‘마지막 로디지아인’이라는 이름의 웹사이트가 발견됐다고 전했다. 백인 우월주의를 조장하는 ‘선언문’ 성격으로 2500단어 분량의 글이 올라와 있다. ‘로디지아’는 현재의 아프리카 짐바브웨 일부 지역에서 소수 백인들이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할 때 사용했던 이름으로 흑인 차별과 관련된 단어로 꼽힌다.

선언문은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스킨헤드도, 진짜 KKK도 없고 다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인터넷에서 떠들기만 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진짜 세계에서 감행하는 용기를 가져야 하고, 그것은 내가 돼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실제로 용의자가 작성한 문서라면 증오범죄 혐의의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이라고 풀이했다. 루프가 성조기를 불태우거나 남부연합기와 총을 든 사진들도 인터넷에서 발견됐다고 BBC방송이 보도했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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