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맹주 사우디의 외교 비법은 오일머니… 위키리크스 외교전문 폭로

입력 2015-06-22 02:05
2011년 ‘아랍의 봄’ 여파로 이집트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축출됐을 때 사우디아라비아 외교부에 긴급 외교전문이 날아왔다. ‘걸프 지역 국가들이 100억 달러(약 11조원)를 줄 경우 (곧 정권을 잡을)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이 무바라크를 풀어준다는 데 동의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우디 왕가는 무바라크와 오랜 기간 친분을 유지했었다. 하지만 이 전문 위에는 누군가 손글씨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는 메모를 적어 놓았고, 이후 ‘일급기밀’로 분류돼 보관됐다.

폭로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가 사우디 외교 공관이 본국에 보고한 6만건의 외교 전문(電文)을 입수해 20일(현지시간) 인터넷에 공개했다. 문서는 2011년부터 최근까지 작성됐으며 전체는 50만건이 넘는다. 위키리크스는 순차적으로 50만건을 모두 공개할 예정이다.

전문들은 사우디가 수니파 이슬람권의 맹주로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과 앙숙인 이란을 흠집 내기 위한 내용이 다수였다. 특히 오일 머니를 바탕으로 금전 지원과 관련된 전문이 많았는데, 뉴욕타임스(NYT)는 이를 두고 ‘사우디의 수표장(Checkbook) 외교’라고 꼬집었다.

한 전문에는 레바논의 정치인이 ‘사우디와 관계가 나쁜 시리아의 바사르 알아사드 정권을 반대하는 활동을 펼치겠다’면서 돈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이 적혀 있었다. 다른 전문에는 이라크의 시아파 출신인 누리 카말 알말리키 총리에 반대하는 야당 인사에게 사우디 메카로 성지순례를 할 수 있는 비자 2000개를 발급해준 내용이 담겨 있다. 성지순례 비자는 경쟁이 심해 얻기가 어려운 것으로 상당한 혜택을 부여한 것이다.

사우디는 호주의 한 아랍계 매체에도 4만 호주달러(약 3500만원)를 지원하는 등 전 세계 이슬람권의 크고 작은 일에도 관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란을 깎아내리기 위한 전문도 다수 발견됐다. 이란 수도 테헤란 주재 사우디대사관은 이란 국민들이 정권 교체를 원하고 있으니 인터넷과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통해 이런 불만을 외부에 노출시키자고 본국에 제안했다. 또 이란의 반정부 인사들을 해외로 나가게 해 이들이 고문 사진 등을 내걸고 기자회견을 하도록 지원하자는 내용도 있었다.

외교 전문에는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이 이란과 러시아를 우회적으로 지원해 서방의 경제제재를 무력화하고 있다’ 등 사우디 주변의 다른 오일 부국을 견제하는 내용도 있었다.

왕족들의 부적절한 행태도 드러났다. 외교 전문 중에는 2009년 사우디 공주 중 한 명인 마하 알이브라힘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리무진을 대여한 뒤 사용료 140만 달러(약 16억원)를 미납한 청구서도 발견됐다. 마하 공주는 액수가 과도하다고 주장하면서 대사관에 이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한 사우디 왕자는 아랍권 내 최고 인기 가수인 레바논의 낸시 아즈람을 초청하면서 정부 기관을 거치지 않고 비자를 발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우디는 이번 자료에 대해 “많은 부분이 조작됐다”며 “자료를 유통시키면 엄벌에 처하겠다”고 경고했다.

손병호 기자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