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찬희] 발칙한 상상

입력 2015-06-22 00:20

공포는 미지(未知)와 무지(無知) 사이에서 똬리를 틀었다. 불신을 먹으며 성장했고, 부실과 허둥거림을 틈타 몸을 키웠다. 불안은 더 이상 과도한 염려가 아니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바이러스는 하룻밤 사이에 일상 속으로 무단 침입했다.

“여보, 둘째가 열이 많이 나.” 월요일자 지면 마감으로 정신이 없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체온계로 재어보니 37.8도가 나오는데 해열제 먹고 나면 괜찮을까? 해열제 먹이는 정도로 괜찮겠지?” 짧은 순간 109 메르스 핫라인부터 보건소, 안심병원 등 온갖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한 발만 더 디디면 공포는 손에 잡히는 현실이 될 듯했다.

지난 7일 부산에서 처음으로 메르스 확진자가 나온 뒤로 그곳에 사시는 아버지는 지하철을 탈 때마다 아무것도 잡지 않는다고 했다. 마스크와 장갑은 기본이다. 6년 전 위암 수술을 받은 어머니는 지난달 말부터 아예 집 밖을 나가지 않는다. 14일 부산에서 두 번째 확진자가 나오자 어머니의 자발적 격리는 연장됐다. 또래 친구들 모두 그렇단다.

지난달 20일 첫 환자가 나온 뒤로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대한민국의 일상은 철저하게 부식됐다. 동네의원이나 약국조차 가길 망설이고, 영화관이나 쇼핑몰은 언감생심이 됐다.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되는지, 손 씻기와 마스크 정도로 바이러스를 차단할 수 있는지 같은 걱정은 ‘기우(杞憂)’가 아니라 ‘생존본능’의 반열에 올라섰다.

시간이 흐르며 현실의 방역은 늦게나마 틀을 잡고 있다. 다만 국민의 마음은 여전히 치명적 ‘공포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다. 그런데도 애써 외면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겠거니 하는 모양이다. 전염병 앞에서 무능한 정부를 본 강렬한 경험이 쉽게 사라질까. 전문가들은 ‘심리적 방역’이 시급하다고 한다. ‘심리적 방역’이라는 단어를 곱씹다가 발칙한 상상이 끼어들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5일 메르스 치료병원인 국립중앙의료원을 찾았다. 노란색 민방위복 차림이었다. 만약 이때 대통령이 방호복을 입고 닫힌 병실 안으로 들어가 의료진의 손을 잡아주고, 환자들과 함께 울었다면 어땠을까. 삼성서울병원에 들이닥쳐 보건 당국을 질타하고, 방호복을 입은 채 병원 곳곳을 누볐다면 어땠을까. “중동식 독감” “불안해하지 말라”는 백 마디 말보다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 지난해 하반기 미국은 에볼라 바이러스 공포에 질식할 지경이었다. 버락 오마바 대통령은 그해 10월 24일 에볼라에 감염됐다 완치된 댈러스 병원 간호사 2명을 백악관으로 불러 포옹하고 키스까지 했다.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메르스 2차 유행의 진원지라는 오명을 쓴 삼성서울병원은 뭇매를 맞고 있다. 이곳은 하루 평균 수술건수 205건, 하루 평균 외래환자 수 8500여명, 의료진 수 3890명을 자랑하는 국내 최고의 병원이다. 이 병원을 국민의 품에 안겨준다면 어떨까.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 우리는 공공의료 서비스나 공공병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목격했다. 2011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체 의료기관 병상 가운데 공공병원 비중은 12%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은 77%다. 위기 때 정부가 통제할 공공병원이 부족하고, 시설·장비는 턱없다. 변변한 감염병 전문병원도 없다. 그나마 있는 공공병원을 폐쇄하는 지방자치단체도 있다. 삼성그룹이 삼성서울병원을 공공병원으로 내놓는다면 그 어떤 사과나 다짐보다 백배 낫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발칙한 상상’이다. 김찬희 사회부 차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