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12) 선교 10년, ‘우리는 무익한 종일 뿐’

입력 2015-06-23 00:53
상동교회는 당시 서울 뿐 아니라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교회로 성장했다. 초기 상동교회 전경(왼쪽). 윌리엄 스크랜턴은 1895년 북한 지역 고위관리인 김선주와 부인 전삼덕(앞줄 중앙)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이덕주 교수, 이화여대 제공

내한 10년 차인 스크랜턴 모자는 한국어뿐 아니라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 심성을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외세 침략으로 인해 시련과 고난을 당하고 있는 한민족에 대한 연민의 정이 깊어갔다. 이들은 그런 안타까운 심정을 글로 표현했다. 메리 스크랜턴은 청일전쟁 무렵, 한국인들의 속담을 영어로 번역, 미국에서 발행되는 ‘Heathen Woman’s Friend’에 발표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Two whales fight and the shrimp is crushed between them)’ ‘깨진 항아리 보고 울어 보았자(Don’t mourn over a broken vase)’ 등 9가지 속담이었는데 모두 개혁을 둘러싼 내부 갈등과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외세 침략으로 인해 불안하고 위태로운 한민족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메리 스크랜턴은 이런 속담을 소개하면서 한국에 나와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를 부탁했다.



한국 선교 10년, 첫 에큐메니컬 선교대회

이런 가운데 상동교회는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급속한 성장을 이룩해 집회 참석 교인 수가 앞서 시작한 정동교회나 아현교회, 동대문교회를 능가했다. 전국에서 가장 큰 교회로 발전했다. 매주일예배 참석 인원은 300명가량이었고 주일학교 학생도 200명에 달했다. 이 때문에 새 예배당 건축을 위해 성도들은 십시일반 헌금을 실시했다. 헌금의 주인공은 대부분 가난한 자들이었다. 부자는 없고 중인 계층과 가난한 자들의 교회, 바로 민중들의 교회였다.

그 무렵 가난한 자들은 상동교회를 찾았고 교회는 영혼과 삶의 안식처가 됐다. 나중에는 사회지도층도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 되면서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교회를 찾았다. 경기도 이천의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구연영, 구한말 부대 장교 출신 이필주 등이 대표적이다.

1895년 10월 9일부터 사흘 간 서울에서는 한국 개신교 선교 10주년 기념대회가 개최됐다. 이 기념대회는 감리교의 스크랜턴과 아펜젤러,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알렌 등 개척 선교사 가족의 내한 10주년을 맞아 그동안 진행된 선교 역사를 정리하고 점검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교파를 초월해 공동으로 개최했다. 스크랜턴과 언더우드가 각각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역사를 발제했고 이어 여성 사역에 대해 스크랜턴 대부인과 언더우드 부인, 베어드 부인, 로드 와일러 선교사가 발표했다.

기념대회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남녀 개척 선교사들이 모두 참여했다. 선교 초기 10년 역사를 정리하며 그 내용과 의미를 돌아보고 미래 선교 방향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각 교파와 선교부, 선교사 개인이 고안하고 추진해왔던 선교 방법들을 종합, 분석해 통합적 선교정책과 방법론을 도출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국 에큐메니컬 선교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대회였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자신의 선교 사역을 정리하면서 “오늘 우리가 우쭐 할 수 없는 것은 훗날 우리가 할 일을 다 마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고백할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학교나 병원 사업을 높이 평가할 수 없는 것도 하나님께서 강력한 방법도 쓰시지만 약한 방법도 쓰시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비롯한 초기 개척 선교사들의 10년 사역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사역이었다”고 평가했다.

기념대회는 그러나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지 못했다. 바로 대회 하루 전인 10월 8일, 새벽 경복궁 안에서 왕비(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하는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그해 1월 국왕과 왕비를 알현했던 스크랜턴 모자로서는 큰 충격과 슬픔을 느꼈다. 고난당하는 한민족에 대한 연민도 더욱 깊어졌다.



북한 지역 첫 여성 세례

장로사로서 스크랜턴은 청일전쟁 이후 서울보다 지방에서 더욱 활기차게 전개되는 선교 현장을 방문하고 지도해야 할 필요성과 책임을 절감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미뤄왔던 지방 순회여행을 시도했다. 수원 장지내교회를 먼저 다녀왔고 1895년 11월 말 평양으로 출발했다. 청일전쟁과 홀 박사 순직 이후 토착 전도인 김창식 혼자 1년 이상 고군분투하고 있는 평양 상황이 궁금했다.

스크랜턴은 평양교회에서 세례를 베풀고 집회를 인도했다. 또 40㎞ 떨어진 시골에 가서 그곳에 살던 은퇴 고위관리 집안에도 복음을 전했다. 고위관리는 김선주(金善柱)로 그는 고종황제의 총애를 입어 1885년 쯤 궁궐에서 승지 벼슬을 지냈고 보령군수로 일하다 고향인 강서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부인 되는 전삼덕(全三德)이 먼저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 부인은 1894년 평양에서 홀 부인을 만나 성경과 전도책자를 얻어 읽은 후 개종을 결심했고 남편 몰래 교회에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스크랜턴은 당시 북한 지역에서 최초로 여성 세례를 집례하게 됐다. 유명한 ‘휘장 세례’를 베풀었다. 방 한 가운데 쳐진 휘장은 오랜 세월 한국사회에서 남녀를 차별했던 두터운 가부장 제도와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휘장 한 가운데 머리 하나 통과할 정도로 작은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여성 세례를 시행했던 것이다. 휘장 가운데 뚫린 구멍은 의미가 크다. 곧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감에 있어서 더 이상 성별과 직업, 계층과 민족의 구별이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유와 해방, 그리고 소통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윌리엄 스크랜턴은 아내인 루이자와 네 딸을 유럽으로 떠나보냈다. 당시만 해도 서울엔 외국인학교가 없어 선교사들은 집에서 기초교육을 시켰다. 초등과정을 마친 다음엔 출국이 불가피했다.

스크랜턴 모자는 이후 원산과 평양으로 선교여행을 떠났다. 서울이든 지방이든 기독교에 대한 불신이나 반감보다는 신뢰와 호감이 많았고 좀더 적극적으로 복음전도 사역을 전개할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스크랜턴 모자는 미국 감리회에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덕주 교수(감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