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박정태 ] 경영권 방어 장치와 기업지배구조

입력 2015-06-20 00:10

기업의 경영권 방어 장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포이즌필(Poison Pill)과 차등의결권 제도다. 포이즌필은 적대적 인수·합병(M&A)이나 경영권 침해 시도가 발생하는 경우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훨씬 싼 가격에 신주를 매입할 수 있도록 미리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다. 기업 사냥꾼에게 독약을 삼키게 한다는 의미로 포이즌필(독약조항)이란 명칭이 붙었다. 차등의결권은 경영권을 보유한 대주주 주식에 보통주의 몇 배에 달하는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미디어 재벌인 루퍼트 머독(84)이 포이즌필을 계속 이용하기로 한 것도 경영권 지키기 차원이다. 정확히 말하면 경영권 승계를 위한 방편이다. 19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머독이 운영하는 미국 미디어 그룹 뉴스코퍼레이션(뉴스코프)은 이미 도입한 포이즌필을 최장 3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앞서 머독은 뉴스코프 자회사인 ‘21세기 폭스’ 최고경영자(CEO)에서 물러나 회장을 맡고, 7월에 차남인 제임스 머독(42)을 CEO에 앉히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렇게 포이즌필을 활용하면 경영권 방어는 쉬워진다.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선진국이 널리 시행하고 있는 장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아직 이 제도가 없다. 2003년 영국계 헤지펀드인 소버린자산운용의 SK 공격 등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권 침탈 시도가 있을 때마다 도입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오너들이 소수 지분으로 경영권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에서 이런 제도를 도입하면 그 지배권이 더욱 공고해져 남용된다며 시민단체 등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을 추진하는 삼성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분쟁을 계기로 재계에서 경영권 방어 장치 도입 논의가 재점화되고 있다. 19일에는 엘리엇이 제기한 가처분 신청에 대한 법원의 첫 심리가 열리면서 법정 공방의 막도 올랐다. 이번 사태를 맞아 투기자본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견고한 방패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방패부터 보유하면 취약한 지배구조 개선 문제가 뒷전으로 밀릴 수 있다는 지적은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