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가지 빛의 성찬 맛보다… 문화역서울284 ‘빛에 대한 31가지 체험전’

입력 2015-06-22 02:40
20세기 초 전위예술가들의 실험적 사진 작품이 전시된 ‘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섹션. 멀리 천장과 이어지는 벽에 투사되고 있는 영상이 앙드레 케르테츠의 작품이다(왼쪽). 뮌의 ‘그린룸’. 그린룸은 배우들이 공연 전후 휴식을 취하는 방을 의미한다.문화역서울284 제공

블랙은 색이 없는 거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여기에 빛이 추가되면 사정은 달라진다. 사진작가 주명덕씨의 말마따나 블랙은 '어둠 속에서 꿈틀대고 소생하는 약동이며 살아 숨쉬는 생명'이 된다. '원색 피로증'에 걸린 도시인의 지친 심신에 위로와 활력을 줄 전시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옛 서울역사를 복합문화공간으로 개조한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리고 있는 '은밀하게 황홀하게: 빛에 대한 31가지 체험전'과 서울 종로구 삼청로 금호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옅은 공기 속으로'가 그것이다. 모두 '흑과 백 그리고 빛'을 주제로 내걸었다.

‘은밀하게 황홀하게’는 한국 프랑스 독일 미국 대만 이탈리아 벨기에 등 8개국 31개 팀이 참여한 사진, 설치, 영상, 미디어아트, 가구 등 140여점으로 성찬을 차렸다. 빛을 주제로 한 7개의 섹션은 어둠에서 시작해 빛을 향해 가는 여정으로 꾸며져 있다.

1층 중앙홀의 왼쪽 전시장에서 출발해 2층 전시장을 통과한 뒤 다시 반대편 계단을 내려와 1층의 원점으로 돌아오는 관람 동선이 재미있다. 시작은 주명덕 작가의 ‘잃어버린 풍경’이다. 캄캄한 산의 풍경을 멀리서, 가까이서 다양하게 찍은 것으로 한참을 들여다봐야 산의 형체나 나뭇잎, 흙 등 사물의 명암이 구별된다. 맨 마지막 방에선 미디어 설치작가 이이남과 하지훈의 작품 사이 절묘한 공간적 결합이 돋보인다. 하지훈의 올록볼록한 작품 ‘자리’에 누워 이이남이 천장에 폭죽 영상으로 쏘아올린 작품 ‘빛 장식장’을 감상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19세기 ‘사진의 발명’과 함께 출발한 100여년 현대미술의 역사를 동시에 펼쳐 보인다는 점에서 중첩적이다. 그래서 전시실 2층 중앙에 자리한 20세기 초기 사진예술 거장들의 작품들에서 관람을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만 레이, 라즐로 모흘리-나기, 라울 유박, 완다 율츠 등 전위적 예술가들은 사진이라는 놀라운 매체에 매료됐다. 인화지를 구부리거나 왜곡거울을 사용해 대상의 형태를 변형시킨 이들의 작품은 쉽게 만나기 힘들다.

21세기 작가들의 사진 작품은 상식을 뒤엎는 유쾌한 경험을 제공한다. 장태원의 도시 풍경은 낮에 찍은 것 같지만, 실상은 밤에 장시간 노출시켜 만든 것이다. 김도균의 우주 사진 ‘b시리즈’도 커튼의 구멍,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만든 속임수이다.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도 빠질 수 없는 주제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원형극장을 형상화한 그룹 ‘뮌’의 작품 ‘그린룸’이 샹들리에처럼 매달려있다. 원형극장에 앉은 사람들의 그림자가 벽마다 확대돼 비쳐 공간 자체가 작품이 된다. 독일 작가 올리버 그림이 만들어내는 360도 파노라마 영상, 독일 작가 베른트 할프헤르가 360도 파노라믹 뷰로 촬영한 사진을 지구의에 매핑한 작품도 눈길을 끈다.

전시 제목은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패러디 같다. 실은 18세기 조선의 실학자들이 카메라의 원조인 카메라 옵스큐라를 중국에서 얻어와 어두운 방에서 실험했을 때의 은밀하고 황홀했던 감동에 대한 기록에서 따왔다. 7월 4일까지(02-3407-3503).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