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저녁 운전대를 쥔 회사원 함모(34)씨의 두 손등은 울긋불긋한 융기들로 반쯤 덮여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 눈길을 주자 그는 오른손을 내밀어 보이며 “메르스 때문에 너무 많이 씻어서 습진이 났다”고 했다. 물이 쏟아지는 세면대 앞에서 손에 비누거품을 낸 뒤 씻고 또 씻어내는 모습이 선했다. 그렇게 문질러 벗겨내려 한 것은 바이러스보다도 감염의 공포였을 것이다.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출발한 차는 그사이 마포구 합정동에 도착했다. 해질 무렵 합정동 거리로 한껏 멋을 낸 청년들이 모여들었지만 전처럼 붐비지 않았다. 커다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다시피 한 여성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방역 마스크는 이제 패션이라도 된 것 같았다.
한 달 전 한국에 침투한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일상에 자리 잡으면서 생활습관과 풍경, 사람 간의 관계가 강제로 바뀌었다. 외출할 때 마스크를 쓰는 사람, 버스와 지하철에서 손잡이를 잡지 않는 사람이 늘었다. 손 소독제가 즐비한 장면은 어색하지 않다. 각종 친목모임은 중단됐다. 사람들은 주변에 메르스 환자가 있지 않을까 의심하며 방어적으로 변했다.
◇마스크와 손 소독제=이날 서울 지하철 2호선 열차를 타고 가던 한 30대 여성은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닦고서야 손잡이를 잡았다. 몇몇 승객이 눈을 돌려 쳐다봤다. 유난스럽다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여성은 메르스에 대한 불안감을 남들보다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손잡이를 닦는 여성이 마스크를 쓴 사람들과 다를 건 없다. 흔들리는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손잡이를 잡지 않고 서 있는 사람을 찾아보는 건 어렵지 않다.
강남구의 한 카드사 영업점에서 일하는 김동욱(26)씨는 “2009년부터 2년 정도 일본에 살다가 돌아왔을 때 집에서도 손 소독제를 쓰고 황사가 조금만 있어도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는데 메르스 이후에는 그런 게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회식자리에서 술잔을 돌리는 모습도 사라졌다고 전했다.
손 소독제는 여러 사람이 이용하는 곳이면 어디서든 찾아볼 수 있는 필수품이 됐다. 구청과 경찰서 등 공공기관은 물론 백화점, 대형마트, 식당, 커피숍, 은행, 극장 등도 법적 의무사항이라도 된 듯 저마다 내부에 손 소독제를 비치해두고 있다. 명동의 한 백화점 입구 안내데스크에 놓인 손 소독제 옆에는 ‘청결한 손 관리로 각종 유해세균을 예방합시다’라고 적힌 표지판이 설치돼 있었다. ‘위생 계몽’의 시대라도 도래한 듯한 인상을 줬다. 이런 안내문은 지금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만연한 불안감=많은 고객을 상대하는 업체나 자영업자는 소비자들을 안심시키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매장에서 메르스 환자가 발생하거나 바이러스 확산 조짐이라도 보일까 노심초사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명동의 한 커피숍 매장은 ‘○○○은 안전합니다. 모든 직원이 비누로 손 씻기, 아크린N으로 매장·개인위생을 준수하고 있습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였다.
사람들은 이웃에 메르스 환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한다. 강동구청 직원들은 마스크를 쓰고 자가 격리자에게 지원 물품을 배달할 때마다 주민들이 수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다고 한다. 한 직원은 “사람들이 ‘이 동네에 메르스 환자가 있나 보다’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이들에게 한 50대 여성은 “여기 메르스 환자가 있느냐. 도대체 왜 온 거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중랑구의 주부 안지현(49·여)씨는 “외출을 더 안하게 됐다. 음식 먹는 것을 신경 쓴다. 면역력을 키워야 메르스에 안 걸린다니까 채소랑 과일 많이 먹는데 사러가기가 좀 그렇다”고 말했다. 그는 “어제 마트에 갔었는데 사람이 없더라. 한 엄마와 열 살쯤 된 아들이 함께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데 아들은 손에 일회용 장갑을 끼고 있었다”고 전했다. 안씨는 요즘 직접 상점에 가기보다 배달을 시킨다. 안씨의 한 이웃은 택배가 와도 직접 받지 않고 문 앞에 두고 가도록 한다.
개인택시 기사 송모(62)씨는 “승객들이 다들 불안하다고 한다. 승객은 택시 기사가, 택시 기사는 승객이 감염됐을까봐 서로 걱정한다”고 말했다. 뚫린 방역 체계가 확대시킨 불안감은 좀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있다.
강창욱 심희정 홍석호 신훈 기자 kcw@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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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6-19 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