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천읍성 남문 원기루(遠奇樓). 그 남문에 올라서면 멀리 읍성을 안고 있는 몽산(299m) 줄기가 병풍처럼 서 있다. 그리고 눈을 읍성 안으로 두면 두드러진 구조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적벽돌을 쌓아 올린 면천감리교회(김용승 목사) 십자가 탑이다.
그런데 이 십자가 탑은 여느 십자가 탑과 달리 고딕형 예배당 꼭대기부터 삼각형으로 치솟은 관례를 따르지 않았다. 기단이 교회 마당에서 시작한 가로 세로 3m 너비의 정방형 십자가탑인 것이다. 적벽돌과 콘크리트로 쌓은 이 탑은 탑두에 이르러 삼각형 지붕을 이었고 그 지붕에 흰 십자가가 올렸다. 높이만 20m이다.
교회 마당 기단으로 한 20m 십자가 탑
면천읍성. 1914년까지 충남 면천군 군아(郡衙)였다. 요즘 말로 군청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된 곳이란 얘기다. 하지만 일제가 조선 강점 이후 행정 개편을 이유로 폐군하면서 당진군(현 당진시)으로 병합됐다. 그 바람에 면천은 한낮 한적한 면소재지에 지나지 않는 고을이 됐다. 면민 다해봐야 3000여명이다.
면천서 평생을 살아온 면천감리교회 박영숙(78·전 미용학원장) 권사는 “1960, 70년대만 하더라도 읍성을 중심으로 한 마을 인구가 1만2000명에 달했다”며 “장날이면 산지사방서 몰려온 장꾼 등으로 교회 앞 장터를 모로 세워 다녀야 했다”고 말했다. 그 장터는 지금 공터가 되고 말았다.
면천은 아산만에 인접한 조선시대 군사요충지였다. 충남 북부 당진, 신창, 덕산, 예산을 연결하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선조 임금 때 면천군 일대에 지각 변동이 일어 5개 면에 걸친 면적이 바다로 변했고 이때 백성은 농토를 잃고 실의에 빠졌다. 그러자 조정은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윤년마다 면천군 기지시(機池市)에서 줄다리기를 실시했는데 이 전통이 지금까지 남아 중요무형문화재 제75호 ‘기지시줄다리기’가 됐다. 그만큼 유서 깊은 고을이라는 얘기다.
김용승 목사, 인치업 장로가 사료 등을 종합해 전한 바에 따르면 면천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95년이다. 동학혁명(1894년) 와중이다. 면천감리교회 연혁사 및 조선그리스도회보 등은 복음의 시작이 유제라는 면천군수서부터 시작됐다고 적었다. 유제는 동학군에 백성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는 벼슬 선유별관(宣諭別官)이 되어 면천에 왔다가 군수(재임 1895∼96)가 된 인물이다. 유제는 아펜젤러 영향으로 예수를 믿었다. 그런데 그의 면직 이유가 눈길을 끈다.
독립신문 기사. ‘면천군수 유제는 포구 풍쇽이 완우하니 진정사를 맛당히 경계하기로 갈니고….’ 이는 곧 아산만 포구의 완고한 풍속을 강력히 통제하다가 원성을 샀다는 얘기다. 기독교사학자들은 포구에서 행해지는 각종 무속행위를 유제가 금함으로써 민심을 잃은 것으로 해석한다.
이후 유제는 당시 덕산군 한내(현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에 살며 복음을 계속 전한다. 면천교회 연혁사는 유제 군수 재임 시 그의 주도로 회중이 됐다고 전한다.
면천감리교회가 공식 문서로서 등장하는 것은 면천초등학교가 보관한 ‘설립개교에 관한 경위’이다. 1908년 근대식 교육기관 사립 ‘면양학교’가 설립됐고 이때 교사(校舍)를 읍내리에 두었는데 이 교사가 8칸 초가 면천감리교회였던 것이다. 일제가 관제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선교사 등이 세운 사립학교를 공립보통학교로 빼앗다시피 하면서 면양학교 역시 1911년 면천보통학교에 흡수되고 만다.
면천보통학교는 읍성 객사 조종관(朝宗館)을 학교 건물로 썼고 그 자리는 지금의 면천초등학교가 됐다. 면천초등학교 운동장 안 홰나무만이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여전히 건재하다.
‘팔복’ 형상화 교회건축 답사객 줄이어
지난 16일 면천감리교회 앞. 면 단위 예배당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독특한 십자가 탑도 그러하려니와 팔각형 지붕을 인 현대적인 교회 건축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등을 축복해주는 팔복(Beatitudes)의 의미를 전통건축 팔각지붕에 녹여낸 예배당이 면천교회다. 교회 앞 옛 관아 일부인 팔각 연정 군자정과 잇는 듯한 교회 건축의 유연성도 인상적이다.
박준성 원로장로는 “다섯 번째 교회 건축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회당을 만들기 위해 기도로 충전하며 발로 뛰어 얻어낸 결과물이다”라고 말했다. 이 예배당은 교회 건축 전문가 집단으로 호평받는 정주건축연구소 작품이다. 1992년 헌당됐다. 김 목사는 “지난주에도 우리 예배당을 보러 4개 팀이 답사를 했다”고 덧붙였다. 당시 건축헌금을 모았다가 부도가 났음에도 교인들이 실의를 이겨내고 합심해 지은 회당이다.
면천감리교회는 늘 이 지역 랜드마크였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와 각종 행사는 지역사회의 구심점이 됐고 문화가 됐다. 특히 1950∼70년대는 성령의 은사가 터져 인근에서 수십 리길 마다 않고 불신자들이 몰려들었다. 또 주일학교와 중고등부, 청년부 등은 이 지역 학생들의 ‘필수 졸업 코스’였다.
회당이 좁아 아미산서 산집회
박 권사의 증언.
“부흥사 이성봉 목사님 등 내로라하는 분들이 성회를 이끌곤 했어요. 600∼700명이 일시에 몰려 정작 본교인이 집회에 참석할 수조차 없었지요.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자가 일어섰어요. 성령의 역사가 증거되어 기쁨이 충만했어요. 안수받을 때 ‘안 넘어질 거다’라고 다짐해봐도 소용없었어요.”
당시 부흥집회는 전국적인 현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충청도 내포문화권에선 면천감리교회가 유독 성령 은사가 많았다. 이들은 회당이 좁아 이종교(異宗敎)적 의미를 담고 있는 당진의 주산 아미산에서 산집회를 열기도 했다. 밤새 나무를 붙잡고 주여, 주여 외치는 이들이 가득했다. 곡식 몇 줌 가져와 밥을 해먹으며 1주일씩 기도를 했다. 교회 부흥회 때에는 먼 데서 오는 참석자를 위해 교인들이 저마다 방을 내주곤 했다.
대장장이 ‘황대장’은 안수 받고 한 달간 붉은 얼굴을 하고 다니다 지병인 해소가 낫고, 애가 유산되곤 하던 어느 집사는 집회에서 은혜 받고 삼남매를 두었으며, 또 다른 어느 집사의 남편은 기도 받고 척추병이 깨끗이 나았다.
“60년대 초일 거예요. 세 번째 예배당에서 집회를 하는데 부흥사 목사님이 ‘나 떠나면 예배당이 무너진다’고 하더라고요. 딱 1주일 뒤 무너졌어요. 그 바람에 온 성도가 밤낮 가리지 않고 모래를 나르고 벽돌을 찍어 새 예배당을 헌당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성령이 시키지 않고서야 그럴 수 있었겠나 싶어요. 말마차와 가마니 들대를 이용해 지었죠. 지서장이 감동받아 교인이 됐을 정도니까요.”
박 권사의 기억이었다. 박 권사는 할머니 유덕순 권사(작고) 품에서 신앙을 키웠다. 그의 아들 이한웅(56·충청대 교수)씨는 새찬송가 571장 작곡자이다. 5대 신앙인 집안이다.
6·25 ‘인공 치하’에서도 예배 이어져
면천감리교회가 유달리 성령 은사가 많았다는 점은 6·25 때도 예배가 끊이지 않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지역을 접수한 인민군은 예배를 방해하지 않았다. 크리스천이라고 총구 한 번 겨누는 일이 없었다. 통상 예배당을 접수해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썼으나 그러지도 않았다. 신비한 일이었다.
또 하나. 퍼내도 퍼내도 주일 출석 100명 이상을 채워준다는 것이다. 면천 지역에 8개 교회가 있고 이 중 남산, 죽동, 송학, 삼웅, 대치에 5개 교회를 개척하면서 면천감리교회 교인들을 떼어내 분립했다. 관내 밖으로는 양유, 성북, 순성중앙교회의 뿌리도 이 교회다. 면민이 급격히 줄어든 지금도 면천감리교회는 출석 교인이 150여명에 이른다. 마르지 않는 축복이다.
당진=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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