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권 정국’ 초읽기… 여론 향배에 달렸다

입력 2015-06-18 03:57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재의 요구) 의지를 강하게 시사하면서 ‘거부권’ 논란이 정국의 핵심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청와대는 개정 국회법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여권 일부와 야권은 ‘입법권’에 해당한다며 정면대치하고 있다. 즉 형태상으로는 청와대가 야당 및 비박(비박근혜)과 팽팽히 맞선 상태다. 하지만 변수는 ‘여론’의 향배다.

◇과거 정부·국회 힘겨루기 결과는=17일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제헌 국회 이후 대통령이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한 사례는 모두 64차례다. 양원제였던 5대 국회 때 참의원이 재의결을 요구한 8건은 제외됐다. 이 중 국회가 재의결해 원안을 통과시킨 사례가 31차례로 성공률이 48.4%다. 여기에 대통령이 재의 요구를 철회해 결국 국회 뜻이 관철된 경우(3대·6대 국회 각 1건)까지 포함하면 절반(51.5%)을 조금 넘는다. 통계상으로만 보면 대통령과 국회의 힘겨루기는 비등했다.

그러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결과는 다르다. 재의결 사례 31건 중 30건이 대통령과 국회와의 갈등이 많았던 1∼2대 국회 때 일이다. 이후 재의결로 통과된 법안은 16대 국회 때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 최도술·이광재·양길승 관련 권력형 비리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이 유일하다.

당시 국회는 2003년 11월 10일 본회의를 열어 재석 192명 중 찬성 183표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법안은 곧바로 정부에 이송됐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2주 후인 25일 재의를 요구했다. 그러나 법안은 재석 266인 중 209인의 찬성으로 재의결됐다. 집권세력이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으로 분열했던 이유도 컸지만 당시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이 특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60%를 웃돌았던 게 주요했다.

이명박정부 때 ‘대중교통의 육성 및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 일명 택시법에서도 여론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뒤 여야 모두 “국회를 무시한 행동”이라며 발끈했지만 ‘택시를 대중교통으로 볼 수 없다’는 여론이 압도적이어서 국회 스스로 재의를 포기했다.

한국갤럽이 지난 5일 발표한 국회법 개정안 관련 여론조사에서는 찬반이 각각 30%, 32%로 비슷했다. 의견 표명을 유보한 층이 38%로 가장 많았다. 국회법 개정안의 위헌성을 주장하는 친박(친박근혜) 성향 의원들이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정의화 국회의장의 결단도 변수다. 정 의장은 “헌법 53조에 재의 요구된 법안이 국회로 돌아오면 ‘재의에 부친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상정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이어 “여야가 모두 재의를 안 하겠다고 하면 모르지만 어느 한쪽이라도 하자고 하면 의장으로서 거절할 수 없다”고 했다. 본회의 상정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여권 내부 갈등 격화=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두고 여권 내부 갈등도 가열되고 있다. 친박은 위헌 소지가 있는 법률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건 대통령의 당연한 책무라고 주장했다. 이에 비주류 측에선 메르스 사태도 진정되지 않았는데 집안싸움에 불을 붙인다며 청와대와 친박 진영을 싸잡아 비판했다.

친박 핵심인 이정현 최고위원은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14대부터 19대 국회까지 행정입법을 통제하기 위해 같은 내용이 거론됐으나 한결같이 위헌적 요소가 있다고 해서 반영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 사이 헌법이 바뀐 것도 아닌데 동일 법안을 강행하려는 것은 헌법 파괴”라고 주장했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상황 인식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김태흠 의원)는 비난도 터져 나왔다.

그러나 정병국 의원은 “청와대 비서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도저히 대통령을 모시는 사람들로서의 자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반박했다. 정 의원은 “글자를 하나 고쳤을 뿐이니 어쩌니 하는 식으로 입법부를 비아냥거리는 것은 이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날을 세웠다. 나경원 의원은 CBS 라디오에 출연해 “거부권을 행사하고 재의결하는 모양새보다는 여야와 청와대가 조금 더 논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전웅빈 김경택 기자 im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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