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8월 장로사로 임명받은 윌리엄 스크랜턴은 지방 선교를 본격적으로 추진키로 하고 인천에 존스, 평양에 홀, 원산에 맥길을 각각 개척선교사로 파송했다. 그는 이들에 대한 지휘, 관리 책임도 지게 되었는데 이 같은 배경에서 지방 여행이 이루어졌다. 스크랜턴은 한국정부로부터 발급받은 여권(호조)을 소지했으며, 작은 가방을 멜빵으로 해서 어깨에 지고 다녔다. 작은 조랑말도 대동했는데 책 상자 하나, 의료품 상자 하나, 모포와 작은 담요, 빵과 버터, 차와 설탕을 챙겼다. 빵과 버터는 한국 여관에서 먹기 힘든 음식이 나올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으나 거의 대부분은 주는 대로 먹었다.
인천과 수원, 기독교인 증가
인천은 선교의 관문이자 뱃길로 경기 충청 전라 황해 평안도까지 연결되는 복음의 수송로였다. 외국인에 대한 반감도 적어 복음 전파 사역이 수월했다. 존스 선교사는 인천에 살면서 전도했고 자신의 집에서 시작한 학교(후의 영화초교)에도 학생 26명이 다니고 있었다. 1893년 5월에는 이화학당 교사였던 벵겔이 존스와 결혼하면서 ‘여성 선교’도 본격화됐다.
여성 선교에는 메리 스크랜턴이 보낸 이씨 부인(이브리스길라)과 백헬렌이 활약했다. 이씨 부인은 이화학당 초기 졸업생으로 한 달간 40명의 부인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백헬렌은 전도부인이었다. 존스 부인이 설립한 여학교(후의 영화여학교) 교사 강재형의 부인 강세실리아와 함께 전도활동을 펼쳤다. 백헬렌은 부인들에게 환영받는 ‘방물장수’로 변신, 6개월간 400여 가정을 방문하며 전도했다. 존스는 강화도 선교에도 나서서 강화도 시루미(현 양사면 교산리)에서 그곳 출신 교인 이승환의 모친에게 첫 세례를 베풀었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수원의 ‘장지내’(현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장지리)도 방문해 세례를 베풀었다. 12월의 추운 대낮에 시냇가에서 세례식을 거행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이 모습을 지켜봤다. 스크랜턴은 지방 여행에 대해 “이번 여행은 내 여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행이었다”고 회고했다.
평양 기독교인 박해 사건
원산은 맥길이 맡고 있었다. 맥길은 원산에 가자마자 450달러로 선교 부지를 확보하고 시약소와 서점을 차리고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맥길은 독단적으로 당시 배재학당 출판사를 맡았던 올링거를 데리고 갔고 이런 처사에 대해 미국 선교본부가 실망감을 표했다. 결국 올링거는 원산에 간 지 6개월 만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한국을 떠났다.
원산 선교가 기대에 못 미치고 있는 것이 아쉬웠던 스크랜턴은 평양을 적극 후원했다. 평양은 힘든 곳이었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사건’에 대한 기억으로 외국인 선교사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선교사가 들어가 살기는 1893년 10월 북장로회 새뮤얼 마펫 선교사가 처음인데 그는 들어가자마자 돌팔매질을 당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감리교 개척선교사 홀의 평양 진입 역시 어려웠다. 1893년 2월 평양 교외 서문밖에 시약소 용도의 한옥 기와집을 구입했으나 홀 가족이 함께 살기까지는 1년이 더 걸렸다. 평양 사람들은 ‘서양 여인’의 등장을 반기지 않았고, 홀 부인은 서울 보구여관에서 사역하면서 남편과 떨어져 지냈다. 평양에서 홀 부부가 같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첫 아들 셔우드 홀이 1893년 11월 10일 태어나면서다. 홀 부인은 1894년 5월 4일, 6개월 된 아기를 안고 이화학당 졸업생 김에스더(김점동) 부부와 함께 평양에 들어갔다.
홀 부인이 평양에 들어간 지 5일 만에 사건이 터졌다. 평양감사가 선교사에게 협조했다는 혐의로 감리교의 김창식, 장로교의 한석진 등 토착교인 10여명을 체포해 고문하고 배교를 강요했던 것이다. 이에 홀은 평양감사를 찾아갔으나 면담조차 거부당했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이 사실을 즉시 미국과 영국 공사관에 통보했다. 외부에서는 이들 공사관의 연락을 받고 그날(5월 10일) 평양감사에게 갇힌 자를 풀어주라는 전보를 보냈다. 평양감사는 체포 하루 만인 5월 11일 저녁, 교인들을 모두 석방했다. 유명한 ‘평양 기독교도 박해사건’이다.
닥터 홀의 희생이 밀알 되다
김창식은 갖은 고생을 했다. 그는 제일 먼저 체포돼 혹독한 고문 속에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고백했고, 반죽음 상태에서 풀려난 뒤에도 주민들의 ‘돌 세례’를 받았다. 선교사들은 이런 그에게 ‘조선의 바울’이란 별칭을 붙여주었고, 홀 부부는 “그의 발아래 꿇어 엎드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표현했다. 김창식은 청일전쟁 중에도 홀로 평양에 남아 시약소 건물에 ‘십자기’를 내걸고 자리를 지켰다. 다행히 청·일 군대는 외교 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해 시약소는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자 교인은 물론 수많은 평양 주민이 그곳에서 피란 생활을 했다.
선교사 홀은 청일전쟁이 끝나자 평양행을 서둘렀다. 그러나 영국 영사는 캐나다(영국 연방) 국적을 가진 홀의 여권을 압수하면서까지 평양행을 막았다. 홀은 환자가 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본영사관이 발행한 ‘임시 여행허가증’을 들고 10월 1일 마펫 선교사와 함께 평양에 들어갔다. 그는 평양으로 가는 도중 전쟁으로 인해 사람 시신과 짐승 사체, 파괴된 가옥을 보면서 ‘힘없는 민족’이 당하는 수난에 가슴 아파했다.
그는 한 달간 몸을 사리지 않고 진료 활동과 교육, 목회 사역을 감당하다가 그만 말라리아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과로가 겹친 그의 병은 회생불능 상태로 악화돼 결국 서울 도착 5일 만인 11월 24일, 34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의 유해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묻혔는데 장로교 선교사 헤론에 이어 두 번째였고 감리교 선교사로는 첫 번째였다.
홀 부인은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12월 6일 미국으로 귀환하면서 장례식을 치르고 남은 돈 600달러를 평양에 세울 기념병원 건축 기금으로 스크랜턴 가족에게 맡겼다. 홀 부인은 3년 후인 1897년 평양으로 돌아와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紀忽)병원’을 설립하고 이후 30년 동안 사역하면서 홀이 남겨두고 떠난 사역을 완벽하게 계승, 발전시켰다.
이덕주 교수(감신대)
[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11) 스크랜턴의 지방 선교여행
입력 2015-06-16 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