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아파. 일어나. 병원 가야 해.”
눈을 번쩍 뜨자 ‘핏발 선’ 아내의 눈동자가 먼저 들어왔다. 품에 안긴 갓난아기는 축 늘어져 있었다. 아직 이름도 정해지지 않은 아기는 집에 온 지 1주일 됐다.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2차 유행 사태가 대전·충청을 덮친 지난 9일 세종시에 사는 ‘초보 아빠’인 기자에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닥쳤다. 장기화되는 메르스 사태가 단순한 공포를 넘어 ‘의료 공백’으로 이어지는 현장을 몸으로 겪어야 했다.
체중 3㎏인 아기의 체온은 38.5도. 전날 밤 시작된 열은 내려가지 않았다. “갓난아기는 엄마에게 받은 면역력 덕에 웬만한 병원체는 거뜬히 막아낸다. 따라서 신생아가 열이 나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방치했다간 패혈증 등 위험해질 수 있다. 무조건 대학병원 수준의 의료기관에 입원해야 한다.” 산부인과에서 받은 예비부모 교육 때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아내가 나를 해가 뜬 뒤에야 깨운 것은 메르스 때문이었다. 세종시에는 큰 병원이 없고 바로 옆 대전은 ‘메르스 지역’이다. 메르스 감염 위험이 높은 대형병원 응급실에 아기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응급실에 못 가니 남편을 깨워봤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아내는 그 시간에 인터넷을 샅샅이 뒤진 터였다. 대전에서 메르스가 미치지 않은 을지대병원을 찾아냈다. 그리고 외래 진료가 시작될 때까지 기다렸다.
자동차로 1시간 거리, 아기는 차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놀라서 경기를 일으켰다. 서울 본사에서 세종시로 파견 온 남편을 원망하는 듯한 아내의 시선이 뒤통수에 꽂혔다. 병원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라디오에서 을지대병원도 메르스 확진자가 나왔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이제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어….” 아내의 절망은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 그래도 을지대병원밖에 대안이 없었다. 아기가 너무 지쳐 있었다.
메르스는 이미 병원을 강타한 상태였다. 일부 구역은 코호트 격리가 취해졌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은 경황없이 세종시에서 달려 온 우리 부부와 아기뿐이었다. 언론사 취재차량들이 마스크 쓴 취재진을 쏟아 냈다. 병원 직원들은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의료진은 수군거렸고 환자들은 “퇴원해야 하나” 하며 술렁였다. ‘메르스 전쟁터’ 한복판에 갓난아기를 데리고 들어간 격이었다.
의사는 입원을 권했다. 다만 신생아 전용병실에 자리가 없어 다른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아내는 사색이 됐다. “어떻게 좀 해봐.” 무기력한 남편을 힐난했다. 메르스 여파로 병원이 한산해져 손이 빈 간호사들이 병원 물색을 도와줬다.
그러나 대전·충청권 대형병원들은 난색을 표했다. 건양대병원 대청병원 등은 이미 ‘메르스 직격탄’을 맞은 터였다. 다른 곳에선 ‘병실에 자리가 없다’ ‘신생아 전문이 아니다’라며 등을 돌렸다. 을지대병원에서 온 연락이라, 또는 고열 환자라는 말에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한 병원에서는 “메르스 선별진료소에서 검사받고 오라”고 했다. 선별진료소는 기침·고열·호흡곤란 환자들이 모이는 곳이다. 집에서 극히 제한적인 사람만 만난 아기가 메르스에 감염될 리 만무했다.
임신 7개월부터 조산기가 심했던 아내에게 담당 주치의는 열악한 지역의료 실태를 토로하며 이렇게 충고했었다. “여기(세종시) 살며 조산하면 큰일이에요. 진통 시작되면 119구급차 불러 대전으로 가세요. 거기도 인큐베이터가 부족하니까 분당 서울대병원까지 가야 할 각오를 하세요.”
이 말과 함께 분당 서울대병원이 떠올랐다. 거리가 110㎞쯤 되니 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고심을 거듭하다 ‘메르스가 확산 중인 서울·경기 대형병원은 피하라’는 을지대병원 의료진의 충고를 듣고 분당에는 가지 않기로 했다.
아기가 울지도 못할 만큼 지쳤을 무렵에야 중부권 A병원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메르스 치료 거점병원이어서 가장 먼저 ‘입원 리스트’에서 제외했던 곳이었다. 찜찜해 하는 아내에게 병원 관계자는 “여기 소아병동은 일반 병실과 떨어져 있다. 신생아 중환자실이 매우 훌륭한 곳”이라고 설득했다.
A병원 의료진은 간단한 검사를 한 뒤 아기를 중환자실로 옮겼다. 아기는 탈진해 기진맥진해 보였다. 담당 의사와 문진(問診)하던 아내가 “척수검사는 필수”라는 말에 울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11일 아기는 열이 내리며 안정을 찾고 있다. 하지만 의료 여건이 열악한 지방에서, 보건 당국이 감염병에 이토록 허둥대는 시기에 아기를 낳았다는 ‘죄 아닌 죄’를 지은 부모의 가슴엔 분노와 미안함이 뒤엉켰다.
대전=이도경 기자 yid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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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6-12 0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