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의 대화-이어령 전 장관] “딸과의 시간 30초 만이라도 주어진다면 ‘굿나잇 키스’ 할 겁니다”

입력 2015-06-12 00:57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10일 오후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에 있는 한 음식점에서 최근 펴낸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를 쓴 동기를 설명하면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1981년 이화여대 영문과 조기 졸업식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이민아 목사와 이 전 장관.
‘딸을 생각하며 높은 파도가 질 때까지 운다’는 이 전 장관의 육필.
“흔히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땅이 아니라 가슴에 묻는다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냥 묻어두는 것만은 아닙니다. 죽음은 씨앗과도 같은 것입니다. 슬픔의 자리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떨어진 자리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우리의 삶을 더 푸르게 하고 풍요롭게 하는 추임새로 돌아오지요.”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독백처럼 들렸다. 이어령(81) 전 문화부 장관의 목소리는 여전히 거침없었지만 사이사이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이 전 장관은 2012년 하늘나라로 먼저 떠난 딸 이민아(1959∼2012) 목사의 3주기를 맞아 평소 가슴속에 묻어뒀던 사연을 담은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열림원)를 최근 펴냈다.

이 책은 칠순이 훌쩍 넘어 딸의 헌신적인 기도로 ‘지성에서 영성으로’ 회심한 이 전 장관이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딸을 가진 모든 아버지들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수많은 사람에게 보내는 위안과 희망의 고백록이다.

고(故) 이 목사는 이 전 장관과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의 맏딸로 태어났다. 첫 결혼에 실패하고 미국에서 검사와 변호사로 활동하다 실명 위기와 큰아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그 뒤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남미 등에서 청소년 구제활동에 헌신하다가 3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0일 오후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한 음식점에서 만난 이 전 장관은 “사람들은 남에게 자기의 우는 모습이나 눈물자국 같은 것을 보여주기를 꺼려한다”면서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은 자기 울음소리가 바깥으로 새지 않도록 수돗물을 틀어놓고 울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자신도 그랬다. 영원히 가슴속에 묻어두고 갈 작정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건네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개켜두었던 글들이 급기야 세상 밖으로 나와 책이 되고 말았다.

처음엔 딸을 잃은 슬픔을 독백처럼 썼다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독백은 대화가 되어 딸에게 이야기하는 글로 바뀌었다. 1인칭에서 2인칭으로, 다시 시간이 흐르면서 급기야는 3인칭으로 바뀌면서 하나의 산문이 되고 시가 됐다고 했다.

이 전 장관은 “딸이 이혼하고 괴로워할 때, 피붙이를 잃고 넋이 나가 주저앉았을 때, 앞을 보지 못해 길을 더듬을 때, 암에 걸려 투병할 때도 사랑하는 딸 곁에 있지 않았다”면서 “그 수많은 날, 홀로 피눈물을 흘렸을 딸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먹먹하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흐느끼듯 말했다.

아버지는 딸을 잃고서 딸의 죽음 자체보다 평소에 ‘굿나잇’같이 아주 평범한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이 아프게 다가왔다고 털어놨다. 어린 딸은 아버지에게 새 잠옷을 자랑하면서 굿나잇 키스를 받고 싶었지만 글쓰기에 몰입한 못난 아버지는 그 짧은 순간, 고개를 한 번 돌리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만일 지금 나에게 그 30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하나님이 그런 기적을 베풀어주신다면, 딱 한 번만이라도 좋아요.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듯이 그때의 옛날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나는 그때처럼 글을 쓸 것이고 딸은 엄마가 사준 레이스 달린 하얀 잠옷을 입겠지요. 그리고 아주 힘차게 서재 문을 열고 ‘아빠 굿나잇!’ 하고 외치면 나는 글 쓰던 펜을 내던지고, 읽다 만 책장을 덮고, 두 팔을 활짝 펴 딸의 가슴을 안을 겁니다. 딸의 키가 천장에 다다를 만큼 높이 들어 올리고 졸음이 온 딸의 눈, 상기된 뺨 위에 굿나잇 키스를 할 겁니다.”

이 전 장관은 책이 나온 뒤에도 자신이 딸에 대해서 쓴 이 글들이 책으로 나온 것에 대해 가시처럼 마음에 턱하고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이 전 장관은 ‘요즘은 왜인지 자꾸 울음이 난다’는 말을 하는 이들에게 위로의 말을 들려주려고 이 글을 썼다고 했다.

그는 아버지로서의 글쓰기와 지식인으로서의 글쓰기를 통합한 창작 행위를 통해, 딸을 잃은 슬픔을 세상의 모든 생명을 품에 안는 사랑으로 풀어냈다고 했다. “딸은 먼저 갔지만, 나를 아버지로 만들어준 내 인생 최고의 스승이었습니다. 이 글들이 나와 내 딸만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와 딸에게 바치는 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책의 인세 수입은 딸이 생전에 했던 희망을 잃은 청소년을 돕는 일에 쓸 계획입니다.”

이 전 장관은 아직도 ‘초보 아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아버지의 가슴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 “세상 아버지들은 죽을 때까지 ‘초’ 자를 떼지 못하는 초보 운전수일 수밖에 없는가 봅니다. 아버지들은 딸을 구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딸이 아버지를 구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것처럼 말이지요. 얼마나 많은 딸들이 임당수에 빠져 목숨을 잃어야 눈먼 아버지들이 눈을 뜨게 될까요. 그걸 알면 아버지들은 절대로 전쟁 같은 것, 남의 생명을 빼앗는 폭력 같은 것, 숲을 사막으로 만드는 환경을 파괴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사진=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