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남호철] ‘형제의 나라’ 터키

입력 2015-06-11 00:20

지난 4월 터키에 갔을 때의 일이다. 섬유의 도시 불단에서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할아버지 요사르 도언씨를 만났다. 원래 만날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들은 86세의 할아버지는 한걸음에 달려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자신의 참전 과정과 종전 이후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지금도 부산에 가면 750명의 전우가 잠들어 있다”며 과거를 회상할 때는 주름 가득한 눈가에서 손으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헤어지는 순간까지 ‘터키와 한국은 형제의 나라’라는 말을 잊지 않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터키인들이 이렇게 진하게 우정을 느끼는 이유는 뭘까. 이를 알아보려면 오래전 역사를 더듬어봐야 한다. 터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오스만 투르크, 셀주크 투르크, 그리고 돌궐로 이어진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고대국가의 틀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돌궐부족은 기원전 12∼1세기 고조선 연방의 일원으로 후계 단군 선출 논의에 참여할 정도로 한 식구나 다름없었다고 전해진다.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와 토문가한에 의해 제국을 건설한 돌궐은 동맹국이 되면서 수·당의 동진과 서진을 차단했고 거란의 팽창을 억제했다고 한다. 돌궐은 몽골고원과 알타이산맥에서 시작해 6∼8세기에는 흑해로부터 고구려 국경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유목민족이다.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돌궐이란 나라에 대해 단지 몇 줄의 설명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터키의 교과서에는 돌궐이 이동해 터키가 됐다는 이야기가 자세하게 기술돼 있다.

이후 형제의 우애는 6·25전쟁 때 진하게 나타난다. 터키는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해준 고마운 나라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파병된 1만5000여명의 터키군 대부분이 지원병이었으며 그중 3500명이 사망했다. 1951년 금양장리(경기도 용인시 김량장동) 전투에서는 중공군에 대승을 거두면서 명성을 세계에 떨쳤으며, 그 과정에서 1131명의 숭고한 생명이 스러졌고 그 가운데 407명은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그들이 열심히 싸웠다는 사실이 놀랍다. 피로 맺은 ‘혈맹지우’임에 틀림없다.

전쟁뿐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상처 입은 한국인들을 치료하고 전쟁고아가 된 아이들을 돌보는 등 몸과 마음을 다해 한국을 도와줬다. 길가에 홀로 버려져 울고 있는 아이를 엄마처럼 따뜻하게 보듬어주면서 보살피는 아이들이 하나둘 늘어나자 아예 고아원까지 설립했다.

두 나라의 우정은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또 한번 뜨겁게 나타났다. 나란히 4강에 올라 3, 4위전에서 맞붙었으나 경기장은 결전의 한판이라기보다 우호의 한마당이었다. 관중들은 태극기와 터키 국기를 함께 흔들며 두 나라를 동시에 응원했다.

지리적으로 아시아 끝과 끝에 있지만 심리적 거리는 무척 가깝다. 지척의 이웃사촌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터키에서 “코리안”이라고 대답하면 터키인들은 대부분 “형제의 나라”라고 반긴다. 터키에서 아마도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일 것이다. 지나치게 느껴질 정도로 우호적으로 다가와 민망해질 때도 적지 않다.

그렇게 진심으로 한국을 형제라고 생각하며 도움을 줬던 터키에 대해 한국은 그렇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2주일만 있으면 6·25전쟁이 발발한 지 65주년이 된다. 위기에 처한 형제의 나라를 도와주려 발 벗고 나선 터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이번 기회에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그들의 한국에 대한 사랑이 더 이상 짝사랑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남호철 관광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