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이 삐삐를 차고 다니던 시절에는 ‘증권가 찌라시’가 중요한 취재 수단이었다. 지금은 잘못 퍼뜨렸다가 구속될 수 있지만 그때는 달랐다. 증권사가 모여 있는 동여의도와 국회가 자리 잡은 서여의도에는 매주 10여종의 찌라시가 오갔다.
선거 때면 누구누구가 공천된다는 말이, 공무원 인사를 앞두고는 온갖 투서 내용이 담겼다. 정치인의 시시콜콜한 뒷이야기와 검찰·경찰의 수사정보가 있었다. 연예인 이야기는 빠지지 않았다. 누구와 누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여배우 누구는 무슨 일을 저질렀다더라…. 아니면 말고 식의 이야기가 ‘진하게’ 나열됐으니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기자들은 찌라시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됐다.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수사기관이 단속을 시작해서? 기자가 게을러져서? 모두 아니다. 그 정도 정보는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뒤지면 더 많은 유언비어성 이야기가 나오고, 그 말의 사실 여부까지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굳이 찌라시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지금은 누구나 손에 컴퓨터를 들고 다닌다. “뭐라 뭐라 카더라”라는 말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으로 검색한다.
정부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메르스 병원 이름을 공개하지 않던 지난 2일 인터넷과 SNS에는 병원 이름이 담긴 문건이 돌았다. ‘○○ 병원 2층에 메르스 환자 3명이 입원해 있으니 가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서울: ○○병원, XX병원, △△ 병원. 수원: □□병원….’ 여기에는 전국의 병원 18곳 이름이 적혀 있었다.
물론 지난 8일 정부가 발표한 ‘확진 환자 발생·경유 29개 의료기관’에 따르면 이 문건의 정확도는 50%에 못 미친다. 하지만 정부가 발표하기 6일 전에 ‘메르스 병원 리스트’가 인터넷에서 빠르게 퍼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유언비어 중에는 잘못된 정보와 정확한 정보가 적당히 버무려진 것이 가장 시선을 끈다. 그게 돈이 되고, 그래서 위험하다. 이번이 그랬다. 정부도 위험성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내린 처방은 시대착오였다. “유언비어를 유포하면 엄하게 처벌하겠다.” ‘찌라시가 먹혔던’ 시절에는 가장 좋은 대책이었을지 모른다. 틀어막으면 해결되던 때가 있었다. 당연히 지금은 아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이 SNS에 글을 올렸다. “지금 엄마가 할머니를 모시고 간 ○○병원은 메르스 병원이래요.” “선생님, 우리 엄마가 메르스 병원이라는 △△병원에 다녀왔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어린이가 유언비어를 유포했는가.
게다가 첫 환자가 발생한 지 18일 만에 공개한 병원 명단은 별로 소용이 없었다. 정작 필요한 것은 ‘메르스 확진 환자가 ○○일 ○○시에 ○○병원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았다’처럼 구체적인 내용이다. 이런 정보, 저런 정보들이 필요하다는 글이 인터넷에 수도 없이 올랐지만 정부 정책에는 제때 반영되지 못했다.
지금 정부는 각종 정책을 결정할 때 인터넷 여론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공무원은 신분이 보장돼 있고, 선거에 나설 필요가 없어서일까. 네티즌들이 인터넷에서 주고받는 수많은 이야기가 정책결정에 반영되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인터넷에 형성된 여론을 반정부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적인 의사표출로 여기거나 초등학생, 중학생의 철없는 생각이라고 무시하는 듯하다.
메르스 병원 명단 공개를 결정할 때 인터넷에 이미 리스트가 돌고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하다. 시시해 보이는 글들을 조금만 세심하게 들춰보면 귀 기울여 들을 좋은 의견이 무척 많다. 그것이 인터넷 세상이다.
고승욱 온라인뉴스부장 swko@kmib.co.kr
[데스크시각-고승욱] 인터넷 여론에 주목하라
입력 2015-06-11 0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