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de&deep] 실적 뻥튀기 열올리는 ‘무늬만 기술금융’ 확 바꾼다

입력 2015-06-09 02:45

금융 당국이 대출 위주의 실적 경쟁으로 비판을 받던 기술금융에 메스를 댔다. 은행이 기존에 거래하던 기업에 기술신용대출을 할 때는 기존 대출액보다 늘어난 대출액만 기술금융 실적으로 인정된다. 기술력은 뛰어나지만 담보가 부족한 기업 및 창업 초기 기업에 대한 지원을 늘리기 위해 은행평가지표에서 양적 지표 비중이 줄고, 신용대출이나 기술기업 지원 실적 등 질적 지표 비중이 늘어난다. 금융위원회는 이런 내용을 담은 기술금융 개선방안을 8일 발표했다.

◇‘무늬만 기술금융’ 오명 벗을까=개선안은 기술금융의 패러다임을 ‘양적 확대’에서 ‘질적 내실화’로 바꾸는 데 초점을 맞췄다. 지난 4월 말 기준 기술신용대출 실적은 25조8000억원(3만9685건)에 달하지만 기존 거래기업 대출 비중이 높아 ‘무늬만 기술금융’이란 비판을 받았다. 금융위는 기존 거래기업의 경우 기술신용정보 평가를 한 뒤 기존 대출 대비 늘어난 대출액만 실적으로 인정키로 했다. 예를 들어 모 은행이 기술신용평가기관(TCB) 평가를 통해 A기업에 일반 시설자금 대출 100억원을 150억원으로 증액하고, 운전자금 대출 20억원을 추가했다면 지금까지는 시설자금 대출 150억원과 운전자금 대출 20억원 등 170억원이 모두 기술신용대출로 인정됐다. 하지만 앞으로는 시설자금 대출 증액분 50억원과 운전자금 대출 20억원 등 70억원만 은행의 실적으로 인정된다.

금융위는 또 기술금융 관련 은행평가지표에서 총 대출규모 등 양적 평가 비중은 40%에서 30%로 줄이고, 기술기업 지원 실적 등 질적 평가 비중을 25%에서 30%로 확대할 계획이다. 평가기간이 지나치게 오래 걸린다는 현장 의견을 수렴해 평가 속도도 높이기로 했다. 은행이 기술신용평가를 신청할 때 우선 평가를 요청하면 15일 이내에 평가를 마치도록 하는 제도가 시행된다. 또 저축은행과 캐피털 등 제2금융권도 기술신용정보를 활용해 대출할 수 있도록 외연을 넓힌다는 방침이다.

기술금융 증가 속도에 맞춰 리스크 관리에도 힘쓰기로 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이날 국민은행의 구로동 종합금융센터를 방문해 “기술신용대출의 증가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은행의 리스크 관리를 보다 철저히 관리할 필요가 있다”며 “기술신용대출을 취급하는 모든 은행에 정기적인 모니터링, 리스크 분석, 경영진 보고체계 수립 등 선제적 리스크 관리체계가 구축되도록 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1년 만에 드러난 ‘기술금융 드라이브’의 민낯=금융위가 개선방안을 발표하면서 제시한 실태조사에는 지난해 7월부터 1년간 진행된 기술금융의 허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우선 기술신용대출 대상 기업 중 신규기업 비중이 24.2%, 우수 기술기업 비중은 13.1%에 불과했다. 은행권이 마땅한 담보 없이 우수한 기술력만 있는 중소·벤처기업은 외면한 채 기존에 거래하던 중소기업에 기술금융으로 이름표만 바꿔 대출해주면서 실적을 올렸기 때문이다.

금융위는 또 금융지원에 앞서 시행하는 평가기관들의 기술신용정보 평가에도 오류가 여럿 발견됐다고 진단했다. 평가서상 A기업에 대한 의견은 “시장 성장률이 우수”라고 돼 있지만 실제 시장 성장성 관련 평가등급은 C등급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문제점은 애초 금융위가 은행권을 상대로 ‘기술금융=혁신’이라며 실적 경쟁을 유도하면서 발생한 측면이 크다.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된 기술신용대출은 지난해 하반기에만 8조9000억원의 실적을 올렸고, 올해도 정부가 세운 최소 목표치 20조원도 조기 달성이 가능할 전망이다. 올해 1∼4월 기술금융 실적은 16조9000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금융위는 여전히 양적 성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금융위는 “은행 간 경쟁이 완화되면 기술금융이 연간 20조원 규모로 안정적 성장세를 보일 것”이라며 “시행 5년차인 2018년 국내 중소법인 대출의 3분의 1 수준인 약 100조원이 기술금융으로 공급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는 금융위가 은행에 기술금융 실적을 압박하던 지난해 창조경제 박람회에서 제시한 목표치와 같다.

◇기술금융 참여자 간 신뢰 구축이 관건=금융 당국 스스로 질적 성장을 공언했지만 수십조원 규모로 덩치가 커진 기술금융이 내실을 다지는 데는 어려움이 예상된다. 기술신용정보의 오류를 줄이고 기술금융의 수익성에 대한 은행권의 의구심을 덜어내야 하는 데다 수요자인 중소·벤처기업의 만족도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기업의 기술신용정보를 평가하는 기관과 실제 대출을 집행하는 은행 사이의 정보 불일치를 줄이고, 전문적 평가인력이 부족한 은행의 역량도 키워야 한다.

대출 위주의 기술금융이 엔젤 및 벤처캐피털 투자와 병행하는 방안은 시행시기가 늦어지고 있다. 금융위는 엔젤 및 벤처캐피털이 기업의 성장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도록 투자형 평가모델 개발 시기를 오는 10월로 잡았다. 또 올해 업무계획상 기술가치평가 투자펀드(우수기술 기업에 기술신용대출 이외 투자 등 모험자본을 지원하는 펀드)는 상반기 3000억원 규모로 조성한 뒤 내년에 규모를 확대키로 했지만 시행시기가 하반기로 늦춰졌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