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정재호] 헌법 10조에서 答 구하라

입력 2015-06-09 00:32

초등학교 4학년인 작은아이가 지난주 이틀간 학교에 가지 못했다. 가벼운 목감기 증세였다. 하지만 아이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TV로 메르스 속보를 보더니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울었다. 그래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가족들이 반대했다. 공기 중 감염과 지역사회 확산 위험이 없다는 정부 주장은 뒷전에 밀렸다. 병원 내 감염이 무섭다고 했다. 혹여나 팔순 노모에게 감기가 옮겨질까 봐 걱정했다. 노모는 더욱 더 병원에 갈 일이 발생해선 안 되니깐. 가족들은 지난 주말과 휴일 내내 불안한 마음을 안고 보냈다.

그 사이 정부는 지난 5일 평택성모병원에 이어 7일 삼성서울병원 등 24개 병원 명단 전부를 공개했다. 환자들이 보건 당국의 추적과 통제를 비웃기라도 하듯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니 기가 막혔다. 필자의 아파트 주변도 예외가 아니었다니 충격은 더 컸다. 포털 지도에서 주소지 아파트와 메르스 환자 발생·경유 병원들과의 거리를 측정해보았다. 삼성서울병원 14㎞, 서울아산병원 5.50㎞, 365서울열린의원 2.96㎞. 불과 2㎞ 거리에 있는 강동경희대병원에 메르스 환자가 경유한 것으로 뒤늦게 공개되자 8일엔 아이 학교가 휴업에 들어갔다.

집 근처 병원까지 메르스 환자 드나들어

이처럼 메르스 환자들이 턱밑까지 오갔는데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라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울러 나와 가족의 생명이 자칫 위협받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화가 났다. 아이들 표현으로 ‘웃픈’ 현실이다.

국민들이 그토록 공포에 떨면서 유언비어라도 믿고 싶어 하고 정부의 정보공개를 외쳤던 것도 바로 생명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으리라. 인간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국가로부터 보호되어야 할 생명, 즉 인간의 존엄과 가치(헌법 제10조)를 무시당했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그래서 정부가 메르스 대응을 하면서 헌법 제10조의 가치와 정신을 얼마나 투영했는지 되묻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정부가 지난 5일 평택성모병원을 첫 공개할 때까지 집요하게 비공개한 이유로 막연한 공포감 확산에 따른 부작용을 들었다. 특정지역의 의료공백, 지역사회의 동요와 지역 간 갈등, 지역경제에 미칠 파급 효과 등이 그것이었다. 마치 ‘공원의 문을 닫아놓고 까마귀를 가두었다’(존 밀턴)고 생각한 것에 다름 아니다. 공원 출입문의 빗장을 걸었으니 그 안에 있는 까마귀(병원 내 감염)만 잘 잡으면 된다는 안이하고 독선적인 ‘프레임’에 갇혀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러는 사이 감염자들은 자유롭게 공원의 담장을 넘어 사방팔방 다니면서 슈퍼 전염자가 돼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했다.

비감염 국민들의 안전도 중요

이렇듯 정부가 마치 공원에 갇힌 1%의 감염자들을 어쩌지 못하면서 공원 밖에서 ‘막연한 공포’에 휩싸인 99%의 국민들에게 “너희는 몰라도 돼”라는 식으로 정보 통제를 가한 우(愚)를 범했다. 환자와 그 가족, 그리고 특정지역 주민의 생명과 신체 보호가 중요한 만큼 나머지 국민의 생명과 신체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걸 정부가 간과한 것이다. 이로 인한 공원 밖 국민들의 패닉은 지역 아닌 국민적 동요와 갈등을 촉발시켰고 국가경제에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는 양상이다. 지난 주말과 휴일엔 ‘외출 안 하고 돈 안 써’ 대한민국 경제도 ‘메르스에 감염’됐다는 보도가 있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반증이다.

헌법 제10조의 가치가 무시되고 정부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을 때 국민들은 헌법 제1조 1항을 외치고 나선다. 2008년 광우병 공포로 인한 촛불시위와 지난해 세월호 사건 당시 촛불집회가 그랬다. 뒤늦게라도 메르스 정보를 신속하게 전면 공개키로 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정재호 편집국 부국장 j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