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정진영] 한국 로봇 ‘휴보’의 쾌거

입력 2015-06-09 00:10

한때 만화영화는 상상의 원천이었다. 볼거리, 놀거리가 변변찮았던 중년 이상의 세대들이 꼬마였던 시절 만화영화는 꿈을 꾸게 하는 주요한 통로였다. 선과 악의 이분법이 철저히 지배하던 당시 만화영화의 주인공은 늘 나쁜놈들을 물리쳤다. 그 캐릭터들은 주로 로봇이었다. ‘철인 28호’ ‘마징가 Z’ ‘로봇 태권 V’는 악을 끝까지 응징하는 정의의 화신이었다.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 언제쯤 실현 가능할지도 모르는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들이 이미 수십년 전부터 ‘우리 편’으로 남아 지구를 지켰다.

공상의 영역이었던 로봇이 어느새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왔다. ‘팍스 로보티카’. 로봇 중심의 세계 질서란 뜻으로 산업계 전반이 로봇 중심으로 재편된다는 의미다. 제조업은 물론 의료, 우주탐사,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로봇의 영역이 확산되고 있는 최근의 흐름을 일컫는다. 2020년 대한민국의 ‘1가구 1로봇’ 시대를 전망하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잇따르고 있다.

7일 저녁 미국으로부터 낭보가 날아들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세계 재난로봇대회에서 카이스트의 ‘휴보(HUBO)’가 미국, 일본 등 경쟁자를 물리치고 1등을 차지했다는 소식이었다. 2004년 12월, 고작 10억원의 연구비로 3년 만에 한국 최초의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을 만든 지 11년 만에 이룬 놀라운 성과다.

한국은 중국, 미국, 일본, 독일과 함께 세계 5대 산업로봇 시장이다. 제조업 근로자 1만명당 산업용 로봇 수를 나타내는 ‘로봇 밀도’는 일본에 이어 2위다. 그러나 핵심 요소와 기반 기술 등 로봇 생태계 수준은 아주 척박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국내 대기업들도 모두 손을 놓았다. 이런 악조건에서 이룬 결실이기에 더 빛난다. 잠시나마 메르스의 불안감을 씻을 만큼 청량할 뿐더러 ‘우승은 시작일 뿐’이라는 휴보 제작의 주역 카이스트 오준호 교수의 수상 소감이 더욱 든든하다.

정진영 논설위원 jy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