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대립하고 있는 현안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이다. 이 법은 국회의장·상임위원장의 직권상정과 다수당의 법안 날치기 처리를 금지함으로써 여야의 몸싸움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려는 취지에서 2012년 도입됐다. 실제로 폭력 사태는 없어졌다. 반면 법안 처리가 지연되면서 국회의 생산성이 떨어지는 등 역기능을 낳았다. 때문에 새누리당은 국회선진화법의 부작용을 부각시키며 개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다. 국회선진화법으로 인해 ‘일하는 국회’ ‘생산적인 국회’를 기대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나아가 소수당의 허락 없이는 어떤 법안도 처리할 수 없는 ‘제왕적 야당’을 만드는 법으로 변질됐다고 주장한다. 반면 새정치민주연합은 국회선진화법을 개정하는 건 천부당만부당하다고 반박한다. 타협과 상생의 정치를 포기하려는 반민주적 발상이며, 본회의장 점거와 날치기라는 구태로 되돌아가자는 의도라고 맞받아치고 있다.
지난달 29일 공무원연금 개혁안과 국회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직후에도 국회선진화법을 둘러싼 공방이 벌어졌다. 여당이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경제활성화법 등 민생법안들이 함께 처리되지 못했다며 개정 방침을 거듭 밝히자 야당은 어불성설이라고 맞섰다. 여야 대립 탓인지 여론도 양분돼 있다. 지난달 하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개정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42%, 반대한다는 응답이 41%로 집계됐다. 여야 원내 대변인들의 의견을 들어봤다. 김진홍 수석논설위원 jhkim@kmib.co.kr
이래서 찬성
박대출 새누리당 대변인(경남 진주갑)
대한민국 국회의원 정수는 300명이다. 현재 정원은 298명이다. 150명 이상이면 헌법을 제외한 어떤 법안도 가결할 수 있어야 한다. 본회의를 기준으로 하는 얘기다. 대한민국 국회는 예외다. 160명으로도 통과시키기 어렵다. 비정상이다.
의회주의의 기본은 다수결 원칙이다. 헌법 제49조에 명시하고 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최대한 합의점을 찾되 여의치 않으면 표결로 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회에서는 무시되고 있다. 야당이 허락하지 않으면 어떤 법안도 통과시킬 수 없는 현실이다. 반(反)의회주의이며, 반(反)헌법적이다.
2012년 5월 국회선진화법으로 불리는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폭력을 추방하고, 대화와 타협으로 선진 국회를 운영하자는 취지였다. 해머와 쇠밧줄, 소화기, 최루탄 등으로 상징되는 폭력국회는 이제 옛일이 됐다. 동물국회란 비아냥도 사라졌다.
대신 무기력 국회, 식물국회가 될 것이라는 당시의 우려와 반대는 현실로 다가왔다. 다수당이 책임정치를 펼 수 있는 안전장치가 해제됐다. 소수당이 응해주지 않으면 국회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됐다. 소수를 존중하는 선을 넘어서 소수에 지배당하는 국회가 되어버렸다. 결국 반쪽만 선진화되고, 반쪽은 후진화된 것이다.
국회선진화법 이듬해 박근혜정부가 출범했다. 정부조직법을 처리하는 데 무려 55일 걸렸다. 16일에 불과한 김대중정부 때보다 세 배가 넘는다.
개정 국회법의 폐해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개정안은 35만개 청년 일자리, 국내총생산(GDP) 1% 포인트 상승효과가 기대된다는 게 정부 추산이다.
야당의 반대로 현재 1050여일이나 계류 중이다. 2조원 규모의 투자, 4만7000명의 고용창출 효과가 예상되는 관광진흥법안은 970여일째 계류 중이다. 2017년 50만명의 외국인 환자 유치가 기대되는 의료법안은 740여일째다.
야당은 사사건건 연계한다. 2013년에는 법안 하나 때문에 새해 예산안 연내 처리를 무산시켰다. 각서까지 써주고 해결해야 했다.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을 놓고는 국민연금, 기초연금, 법인세, 장관 해임,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 국회법 등 줄줄이 조건으로 내걸었다.
국회선진화법은 선의(善意)는 사라지고, 악의(惡意)만 남았다.
‘야당 독재’ ‘소수 독재’를 가능케 하는 국회후진화법으로 전락했다. 지구상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제왕적 야당법’으로 변질됐다. 야당 내에서도 이 법으로 자승자박이 될 수 있는 만큼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양심의 목소리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많은 법률 전문가들은 위헌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제85조 1항과 2항은 ‘심사기간 지정’과 ‘신속처리대상 안건 지정’에서 ‘재적 5분의 3 이상’을 의결 요건으로 정하고 있다. 이는 헌법 제49조의 다수결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1990년 3당 합당으로 216석을 가졌던 민자당 이후 재적 5분의 3인 180석 이상을 보유한 정당이 없다. 제85조의 두 조항은 ‘재적 5분의 3 이상’은 사실상 만장일치를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지금 국회법에는 입법권 무력화에 대비한 안전장치 내지 통제장치가 사실상 없다. 이는 입법권을 국회에 귀속시킨 헌법 제40조의 취지가 무너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과잉입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새누리당은 지난 1월 개정 국회법에 대해 권한쟁의 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했다. 앞서 지난해 9월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모임’도 “국회마비법의 위헌 확인”을 구하는 헌법소원을 제기한 바 있다. 조속히 헌재 결정이 나와야 한다. 동물국회의 대안이 식물국회는 아니다.
이래서 반대
박수현 새정치민주연합 대변인(충남 공주시)
새누리당이 국회선진화법의 무력화를 시도하고 있다. 얼마 전 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위원이 국회선진화법을 ‘반(反)헌법적 법률’이라고 혹평하더니 김무성 대표는 지난달 29일 “국회선진화법이 현행대로 유지된다면 정말 우리나라 미래에 큰 불행과 장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발언은 한마디로 ‘누워 침 뱉기’라서 일일이 대꾸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새누리당이 정부조직법 논란, 세월호 특별법 제정 등 여야 간 갈등이 있을 때마다 국회선진화법 개정카드를 들고 나오니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다.
국회선진화법이 정말로 우리의 정치문화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 있는지는 관련 전문가들의 보다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할 수도 있다. 또한 우리 새정치민주연합도 현행 국회선진화법이 완벽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회선진화법의 탄생과정을 생각한다면, 새누리당이 저토록 쉽게 180도 입장을 바꿔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날치기 방지법’ 또는 ‘몸싸움 방지법’이라 불리는 국회선진화법은 날치기 등 다수당의 횡포로 인한 여야의 극한대립과 물리적 충돌을 막고, 새로운 국회상을 정립하자는 취지에서 2012년 5월 통과된 것이다.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18대 국회가 끝나기 전에 국회선진화법안을 꼭 처리해야 한다. 총선 전 여야가 합의한 것이고 국민에게 약속을 드렸다”고 말했으며, 직접 찬성표를 던졌다.
그런데 국회선진화법이 채 잉크도 마르기도 전부터 새누리당은 개정을 주장하는가 하면 헌법소원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겉으로는 다수결 원칙에 위배되고 일하는 국회를 만드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속내는 ‘다수당인 새누리당이 마음대로 하기 어려우니 법을 바꾸자’는 것이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는 것은 지금의 새누리당을 일컫는 말이다.
사실 새누리당이 국회선진화법 통과를 위해 거당적으로 나섰던 것은, 19대 총선을 앞두고 소수당인 야당으로 전락할 것이 분명해지자 국회선진화법을 통과시켜서 자신의 입지를 보전하고 다수당을 견제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19대 총선에서 뜻하지 않게(?) 다수당이 되자 태도가 180도 달라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새누리당의 시커먼 속내를 모를 국민은 없다고 생각한다. 새누리당이 다수결의 원칙을 거론하고,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19대 국회의 민생법안들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을 만들지만 이에 동의하는 국민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국회의 법안 처리 현황을 보면 2010년 384개, 2011년 945개, 그리고 2012년에는 258개 법안이 처리되던 것이 국회선진화법 제정 이후인 2013년 들어서면서 처리 법안이 급증해 무려 764개에 달했고 지난해에도 697개의 법안이 처리된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국회의 법안 처리가 안 되고 있다는 새누리당의 주장은 거짓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새누리당의 국회선진화법 개정 요구는 국회에서 다수결로 통과된 법안을 국회 스스로 부정하는 반의회주의이자 다수결 원칙의 부정이다. 또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법안들만 날치기 처리하겠다는 대국민·대야당 선전포고이다.
거듭 말하지만 국회선진화법은 다수당이 독점적이고 일방적인 운영권을 포기하고 야당과의 협상과 타협을 통해 민주적인 국회운영이 이뤄지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는 우리 정치문화의 선진화를 위한 발판이다. 만일 다수당의 필요에 의해 국회선진화법을 누더기로 만든다면, 그것은 바로 국회선진화의 포기이자 한국정치의 퇴보를 초래하는 폭거다. 새누리당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가 얼마나 무모하고 무책임한 것인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슈 논쟁-국회선진화법 개정] ‘국회마비법’ 고쳐야 vs 다수당 뜻대로 하려는 검은 속내
입력 2015-06-10 0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