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롭던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이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엘리엇)의 개입으로 최대 난관에 부닥쳤다. 엘리엇은 지난 4일 삼성물산 지분을 7.12% 보유했다고 공시하며 두 회사의 합병을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엘리엇은 또 삼성물산 지분 9.98%를 보유한 1대 주주 국민연금에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에 반대해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는 등 본격적인 세 모으기에 나섰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엘리엇의 이런 행동이 지분 매입 경쟁을 유도해 막대한 시세차익을 노리는 외국계 헤지펀드의 전형적인 패턴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지만, 엘리엇이 합병을 둘러싸고 삼성과 전면전을 벌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삼성 측이 두 회사의 합병 과정에서 주주들과의 소통에 실패한 데 대해 반성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엘리엇은 왜 합병에 반대하나=7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엘리엇은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며 3대 주주로 올라섰다. 엘리엇은 지분보유 공시와 함께 “제일모직의 삼성물산 합병계획안은 삼성물산의 가치를 과소평가했고, 합병조건도 공정하지 않다”며 “이는 삼성물산 주주들의 이익에 반한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엘리엇은 또 “현물배당을 할 수 있도록 정관을 개정해 달라”는 내용의 주주제안서를 보내면서 다음 달 17일 합병 승인을 위해 열리는 임시주주총회에 의안으로 상정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외국인투자자를 규합해 삼성물산의 경영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비율은 1대 0.35(0.3500885)다. 자본시장법에 따라 보통주 기준 주가를 합병가액으로 놓고 비율을 산출했지만 삼성물산 주식가치가 제일모직의 3분의 1 수준이다. 하지만 주주 입장에서 합병을 긍정적 이슈로 보는 시각도 많다. 허남권 신영자산운용 부사장은 “합병 비율 1대 0.35가 상당히 불균형한 것처럼 보이지만 미래 가치가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거나 평가 가치가 달라진다고 가정하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엘리엇이 ‘경영 참여’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시장에서는 시세차익을 노린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상법상 상임이사 추천 등 경영권을 행사하려면 10% 이상 지분이 필요한데 추가 매입 가능성은 낮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현물배당을 요구한 정관 변경도 쉽지 않다. 주총에서 정관 변경은 출석 주주의 3분의 2, 전체 주주의 3분의 1 이상 찬성이 필요하다. 현재 7%대 지분을 보유한 엘리엇이 이를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
일각에서는 엘리엇의 행동을 두고 외국계 펀드의 ‘먹튀 논란’으로만 볼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삼성물산 주주들과의 소통 없이 무리하게 합병을 추진하면서 외국계 주주의 반발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한성대 김상조 교수는 “제일모직 주가는 과대평가되고 삼성물산 주가는 과소평가된 상황에서 합병 비율을 정하면서도 왜 이런 시점에 합병을 결정했는지에 대해 주주들이나 시장 관계자들과의 소통이 부족했다”며 “삼성이 이번에 큰 교훈을 얻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지배구조 개편 이슈만 강조될 뿐 두 회사의 합병에 따른 시너지 효과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았다는 불만도 제기되고 있다.
◇‘소버린 사태’ 악몽 재연되나, 다음 달 17일 임시주총 앞두고 긴장 고조=엘리엇의 적극적인 공격은 2003년 4월 영국계 헤지펀드 소버린자산운용이 SK 지분 14.99%를 매입해 2대 주주에 오른 뒤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며 경영권을 간섭했던 사례와 비교되고 있다. 당시 소버린은 주당 평균 9293원에 사들인 주식을 2005년 6월 철수하면서 지분 전량을 팔아 배당금과 환차익을 포함해 1조원 가까운 시세차익을 거뒀다.
삼성물산도 외국계 펀드의 공격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2004년 3월 영국계 연기금펀드인 헤르메스 인베스트먼트 매니지먼트(헤르메스)는 삼성물산 지분 5%를 매입해 경영권을 간섭하다 그해 12월 갑작스레 지분을 시장에 내다팔아 380억원대 차익을 챙겼다.
엘리엇이 경영 참여 의사를 명확히 한 이상 외국계 주주와 삼성 측의 지분매입 경쟁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외국인들은 엘리엇의 경영 참여 의사를 밝힌 지난 4일에만 약 155만주를 순매수했다. 이 때문에 합병 발표 전인 지난달 22일 5만5300원이었던 삼성물산 주가는 지난 5일 7만6100원까지 뛰어올랐다.
삼성물산의 공매도(가격 하락을 예상해 주식을 빌려서 매도한 후 주가가 떨어진 뒤 이를 되갚아 시세차익을 얻는 방식) 물량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지난 5일 삼성물산의 공매도 물량은 57만8171주(약 430억7000만원)로 관련 통계가 존재하는 2008년 이후 가장 큰 규모를 나타냈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
[Wide&deep-제일모직 합병 연이은 트집] 엘리엇, 이번엔 국민연금 압박… “합병 반대하라” 서한
입력 2015-06-08 0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