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엔화가치 하락)가 장기화하면서 한국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 특히 엔저에 따른 우리 상품의 가격경쟁력 약화로 일본과의 경합도가 높은 ‘성장엔진’ 수출이 휘청거리면서 저성장이 지속될 것이란 우려가 크다. 이는 1980∼90년대 엔고 환경에서 지속된 수출경쟁력을 발판 삼아 ‘중진국 함정’(개발도상국이 경제발전 초기에는 순조롭게 성장하다 중진국 수준에서 성장세가 둔화되는 현상)을 비교적 빠르게 벗어났던 상황과는 정반대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7일 한국은행 경제통계 시스템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1985년 2400달러에서 1991년 7508달러로 급격히 상승했다. 이후 1994년 1만 달러를 넘어섰고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당시 한풀 꺾였으나 빠르게 회복하면서 지난해 2만8000달러를 넘어섰다. 세계은행이 정의하는 중진국 함정의 기준은 1인당 국민소득 6900달러 수준이다. 한국은 90년대 초반에 별 어려움 없이 이를 단숨에 돌파한 셈이다.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 배경에는 ‘3저 호황’(저달러·저유가·저금리)의 유리한 국제환경 속에서 진행된 ‘엔고 효과’가 일정 부분 도움을 줬다. 1984년만 해도 달러당 237엔대였던 엔·달러 환율은 1986년 168엔대로 급격히 떨어지고 1988년에는 128엔대까지 추락한다. 결국 198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진행된 엔고(엔화가치 상승) 덕분에 한국의 수출은 날개를 달았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 ‘아베노믹스’를 내세운 일본의 엔저 공세 속에 한국경제는 속수무책이다. 2012년만 해도 100엔당 1500원대였던 원·엔 재정환율은 최근 900원선을 밑돌며 수출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의 수출경합도지수는 2008년 0.456에서 2013년 0.487로 증가하면서 엔저의 체감 효과는 더 커졌다. 신한금융투자 윤창용 연구원은 “올해 1분기 중 수출의 전기 대비 성장기여도는 0.1% 포인트에 그쳤고, 이마저 재화가 아니라 서비스 수출이 개선된 영향”이라며 “올해 순수출 성장기여도는 0.0%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부도 해외투자 활성화 등 원화 약세를 유도하는 정책을 고민하고 있지만 계속되는 엔저에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 특히 한국경제가 고령화와 노동인구 감소 등 일본이 장기 불황의 길을 걸었던 상황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경고가 나오는 상황이어서 수출 부진은 한국경제의 성장잠재력을 크게 해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HSBC는 최근 보고서에서 “한국은 최근 저성장이 장기화하고 소득 수준 정체 우려가 커지고 있다”며 “일본과 프랑스가 겪고 있는 선진국 함정(중진국 수준 이상 소득에서 성장이 지체되는 현상)에 빠지지 않으려면 선제적인 구조개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
[기획] 한국경제 저성장 장기화되나… 엔高로 ‘중진국 함정’ 벗어났는데 엔低에 ‘선진국 함정’ 위기
입력 2015-06-08 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