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형(50) 탁구 남자국가대표팀 코치는 지난달 하순 수백 통의 전화를 받았다. 외동아들인 안병훈(24)이 유럽남자골프투어 메이저대회인 BMW PGA챔피언십에서 우승컵을 안았기 때문이다. 올해 유럽투어 신인인 아들의 첫 우승은 태릉선수촌에서 선수들과 씨름하던 안 코치를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1989년 결혼 당시 한·중 탁구커플로 꽤나 유명세를 탔던 안 코치는 탁구 지도자의 꿈을 접고 무려 8년간 ‘골프 대디(daddy·아빠)’로 아들 뒷바라지에 매달렸다. 그리고 올 초 9년 만에 온전히 탁구인으로 되돌아왔다. 누구보다도 치열했던 골프 대디의 인생은 태릉선수촌에서 아버지 같은 리더십으로 선수들에게 다가왔다.
#“한시도 탁구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여느 골프 대디와 달랐다. 그가 아들 뒷바라지에만 매달리기로 결심한 것은 실업 탁구 대한항공 감독을 막 맡았던 2006년이었다. 2005년 중2 때 미국으로 골프 유학을 떠난 아들이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자 어린 아들의 미래를 위해 갓 시작한 탁구 지도자로서의 꿈을 접은 것이다. 그로부터 무려 8년간 안 코치는 아들의 매니저로, 운전기사로, 캐디로 1인 다역을 자처하면서 뒷바라지에 올인했다. 경제적인 뒷받침은 중국에서 여성사업가로 성공한 아내 자오즈민이 맡았다. 지난해 말 유럽 2부투어 파이널경기가 그가 아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멘 골프백이 됐다.
보람도 있었다. 2009년 US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안병훈이 17세 나이로 우승하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이듬해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메이저대회인 US오픈에 출전, 성공이 손에 잡히는 듯 했다. 하지만 2011년 프로 진출을 선언한 아들이 유럽투어에서 첫 승을 거두기까지 무려 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골프백을 멨지만 그는 여전히 탁구인의 삶을 놓지 않았다. 해외 생활에도 불구하고 감독 시절인 2006년부터 맡았던 국내 실업탁구 선수 랭킹 산정 작업을 도맡았다. 각종 대회가 끝나면 선수 개개인의 성적을 점수화해 국내랭킹을 매기는 꽤나 복잡한 일이었다. 골프 대디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가운데도 그의 삶 절반은 여전히 한국 탁구에 머물고 있었던 셈이다. 아울러 세계대회나 올림픽 등 비중 있는 대회는 짬을 내 참관하며 세계 탁구계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는 한국선수단을 방문해 선수들과 재회하기도 했다.
중국 내 탁구 인맥도 그의 큰 자산이다. 중국인 아내가 많이 돕기도 하지만 그는 아내를 위해 배운 유창한 중국어를 앞세워 세계최강 중국 탁구에 누구보다도 정통했다. 이 같은 그를 높이 평가한 대한탁구협회는 지난해 말 그의 귀국 의사를 타진했고, 올 초 남자 국가대표 코치로 전격 발탁했다. 그는 “8년간 아들의 골프백을 멨지만 한시도 탁구를 잊은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아빠처럼 대화도 많이 하고 자상하게 지도해줘요.”
안 코치가 맡은 한국 남자대표팀은 최근 하향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한국을 세계 2위권으로 끌어올린 주세혁, 유승민, 오상은이 대표팀에서 물러나면서 세대교체의 진통을 겪고 있는 탓이다.
한국이 세계 8강권이라고 진단한 안 코치는 자신이 국가대표로 뛰던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직전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그럼에도 당시 열심히 운동에 매진한 결과 2년 뒤 서울올림픽에서는 남자단식 금메달(유남규), 단식 은메달(김기택)과 복식 동메달(안재형·유남규)을 획득했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연습밖에 다른 묘책이 없다고 했다.
그가 지난 3월 대표팀 코치로 부임하자 선수들이 더 당황했다. 9년간 국내 탁구를 떠나 있어 젊은 대표선수들은 그를 사진으로만 봤을 뿐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어렵게 느꼈던 선수들도 뜻밖의 자상함에 놀랐다고 한다.
대표팀의 정영식(23·대우증권)은 “대개 코치님들은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데 비해 안 코치님은 아주 달랐다”면서 “자상하고 선수들과 대화도 많이 해 마치 아버지 같다”고 말했다. 이어 “아주 섬세한 부분까지 기술 지도를 해주고 연습량도 훨씬 많다”며 “야간훈련 시 게임할 때는 선수들의 장단점을 일일이 메모하는 등 대단한 열정을 보여준다”고 흡족해했다.
사실 안 코치는 남자국가대표팀 감독을 이미 역임한 유남규(47), 김택수(45) 보다 선배다. 안 코치의 노력으로 대표팀은 지난달 중국 쑤저우세계선수권대회 남자복식에서 이상수-서현덕(삼성생명) 조가 동메달을 획득하며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안재형의 탁구 열정’을 다시 이끌어낸 데는 이유성 대한탁구협회 부회장의 설득이 주효했다. 2006년 이 부회장은 자신의 대한항공 감독 후임으로 안재형을 천거했던 인연이 있다. 안재형이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미국으로 떠났지만 이 부회장은 그를 계속 지켜봤다. 지난해 말 “아들이 유럽 1부 투어에 뛰게 됐으니 이제는 전문 캐디에게 맡기고 탁구계로 돌아오라”는 그의 고언에 안 코치가 화답한 것이다.
서완석 체육전문기자 wssuh@kmib.co.kr
안재형 男 국가대표 코치 “내 본업은 탁구… ‘골프 대디’ 잊어주세요”
입력 2015-06-09 0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