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회 곳곳에서 정원사, 보모, 건축 일용노동자, 식당 종업원 등 저임금의 육체노동을 대부분 담당하는 이들은 히스패닉(중남미계 주민)이다.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텍사스주 등 주로 미 대륙의 서부에 밀집돼 있던 이들이 이제는 남부 주는 물론 뉴욕·뉴저지·워싱턴DC·버지니아주 등 동부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미국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거대한 변화의 하나가 히스패닉 인구의 급증이다. 2016년 대선 등 각종 선거에서 히스패닉 인구집단이 ‘캐스팅 보트’를 쥘 것이라는 건 이제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머릿수를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만 커지는 게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각도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히스패닉의 교육 수준이 낮은 데다 미국 사회에 동화되려는 의지가 약하다며 미국의 장래에 부담이 될 것이라는 비관론이 있었다. 하지만 히스패닉에 대한 고정관념이 잘못된 것이며 이들이 미국에 엄청난 축복일 뿐 아니라 기회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향후 미국의 번영이 히스패닉에 크게 힘입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히스패닉 인구 혁명=히스패닉이 몰고 오는 변화의 근원은 인구 추세다. 지난 200여년간 미국 인구의 80∼90%는 유럽계 백인이었다. 2010년 백인의 비중은 64%로 하락했다. 전체 인구 중 백인 비중은 2044년이면 50% 아래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1953년 300만명 수준이었던 히스패닉은 1970년 900만명으로 치솟았다. 린든 존슨 대통령 때 통과한 ‘개정 이민법(하트-셀러법)’의 영향이 컸다. 2013년 현재 히스패닉은 5400만명으로 미국 전 인구의 17%를 차지한다. 미 인구조사국(US Census Bureau)에 따르면 2050년에는 히스패닉이 전 인구의 28%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3월 14일자 미국 히스패닉 특집판에 ‘마이너(소수파)에서 메이저(다수파)로’라는 제목을 붙였다. 히스패닉 인구의 급증은 미국의 주류가 누구인가에 대한 정의 자체를 바꾸고 있다.
보수 성향이 강한 공화당 의원들은 국경 강화를 통해 빗장을 걸어 잠그고 불법 이민자를 추방하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국경 강화 등으로 히스패닉 인구의 증가 추세가 바뀔 여지는 별로 없다.
통계조사 전문기관인 퓨리서치센터가 2012, 2013년 미국 내 히스패닉 인구 증가 추이를 분석한 결과 이민에 따른 증가(22%)보다 미국 내 출산(78%)으로 인한 인구 증가가 3배 이상으로 많았다. 불법 유입이 아니라 미국 내 출산율 증가가 히스패닉의 팽창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모든 영역에 지각변동=무엇보다 히스패닉의 증가가 미국에 기회라는 것은 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이 직면한 인구 고령화의 함정을 피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2050년 독일 국민의 중위연령(특정 인구집단을 나이순으로 한 줄로 쭉 세웠을 때 한가운데 있는 사람의 나이·median age)은 52세로 예상된다. 중국도 출산율 감소로 중위연령의 증가와 노동력 감소 현상이 이미 시작됐다.
하지만 미국만은 예외다. 미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백인의 중위연령은 42세, 흑인은 32세, 히스패닉은 28세다. 특히 미국에서 출생한 히스패닉의 중위연령은 놀랍게도 18세에 불과하다. 매년 90만명의 히스패닉들이 투표를 할 수 있는 20세에 달한다.
다른 선진·중진국들이 고령화와 인구 감소에 직면해 있지만 미국의 학교에는 히스패닉으로 인해 각급 학교에 학생들이 넘쳐나는 것이다. 이는 곧 미래의 노동자 공급으로 이어진다.
미 브루킹스연구소의 윌리엄 프레이 선임연구원은 저서 ‘다양성 폭발(Diversity Explosion)’에서 “몇 년 안에 미국에서 65세 이상 백인 노인의 수는 백인 어린이 수와 같게 되는 반면 비백인 가운데 어린이 수는 노인의 4배에 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특히 이 수치에서 히스패닉과 아시안 등 급증하는 소수인종집단을 제외할 경우 미국의 모습은 연금수급자 폭증과 노동력 감소로 고민하는 이탈리아와 비슷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히스패닉은 미국의 겉과 속 모두를 바꾸는 주체로 등장했다. NBC유니버설 히스패닉 담당 조 우바 회장은 “1조100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 히스패닉의 구매력은 한 국가로 치면 세계 16위에 랭크된다”며 경제적 영향력을 강조했다.
하지만 히스패닉이 영원히 미국의 최하층계급이 되는 것 아니냐는 비관론이 미국 학계와 정계에 존재해 왔다. 특히 백인 보수층은 히스패닉 이민은 세대를 넘어갈수록 학력 성취도가 떨어지고 건강상태도 좋지 않다는 ‘하향 동화(downward assimilation)’ 이론을 내세우며 히스패닉이 정부보조금과 복지예산을 축내며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시각을 보여왔다. 실제 히스패닉의 고등학교 중퇴율은 백인보다 훨씬 높으며, 대학 학위 취득률도 낮다. 성인 히스패닉 중 매니저나 전문직 종사자의 비율은 백인의 절반 수준이다. 히스패닉이 부정부패와 범죄에 물든 고국과의 연계성을 끊지 못하고 미국 사회로의 동화에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프레이 선임연구원 등 전문가들은 이러한 불안이 과장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추세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히스패닉을 추방하는 대신 기회로 여기고 다양한 지원 정책을 추진한 테네시주 등에서 히스패닉 학생들의 고교 졸업률이 크게 높아졌고 대학 학위 취득률도 향상되고 있다. 10대 임신율도 크게 낮아졌다. 최근 히스패닉과 다른 인종과의 결혼율도 높아져 미국 사회로의 동화도 본격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히스패닉 인구는 미국의 대단한 행운이자 기회라며 미국은 이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다른 해외 경쟁국들이 고령화로 고전하는 가운데 미국은 히스패닉 인구로 인해 젊음과 에너지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
[월드 이슈] 히스패닉 인구 폭발 미국이 젊어졌다… 히스패닉, 美 인구 비중 20% 육박 주류사회에 진입하나
입력 2015-06-16 0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