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2일은 한·일 국교정상화(수교) 50주년 기념일. 1951년 10월 20일 예비회담이 시작돼 7차에 걸친 협상이 마무리된 그날, 일본 총리관저에서 한·일 기본조약과 4개 부속협정에 대한 조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14년이나 끈 협상의 종료를 두고 국내에서는 반발이 빗발쳤다. 양국의 엇갈린 주장을 적당하게 얼버무린 협상내용 탓이다. 무엇보다 기본조약은 두 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는 양국 간 과거청산이 오늘날까지 논쟁거리로 남게 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우선 한일합병의 불법성을 명확하게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합병조약을 비롯한 일본과 맺은 모든 조약·협정에 대해 무효임을 밝히는 대목을 ‘이미(already) 무효’라는 문구로 조율해 해석상의 여지를 남겼다(기본조약 2조). 한국은 원천무효로 이해한 반면 일본은 당시엔 유효였고 ‘이제는’ 무효라는 입장을 고수한 결과다.
협상이 오래 걸린 것도 양국의 입장차 때문이다. 특히 일본이 입장을 고수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만연했던 식민지주의(colonialism)를 빼놓고 거론하기 어렵다. 한일합병 당시 세계는 식민지 확장경쟁 중이었고 강자의 논리만 가득했다. 2차대전의 승자·패자를 불문하고 식민지를 경영하는 상황이었다. 강대국들은 강자가 약자를 다스리는 것을 도덕률로 떠받드는 식민지주의에 매몰돼 있었다. 연합국들조차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과정에서 식민지 피지배자의 입장보다 되레 패전국을 옹호하는 지경이었다.
게다가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해 9월 14일 대일강화 촉진 성명을 내고 ‘패전국 일본 활용정책’에 물꼬를 텄다. 이로써 일본은 더 이상 패전국이 아니라 민주주의 진영의 주요 멤버로 격상되기 시작했다. 이에 이승만정부는 한국이 대일강화 협상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를 갈급했으나 미국, 영국 그리고 일본이 앞장서서 반대했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안중에도 없었다. 대일강화는 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조인되면서 구체화됐는데 한·일 수교 예비협상이 그해 10월부터 시작됐음을 감안하면 처음부터 일본의 입장이 우선적으로 반영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두 번째 문제점은 기본조약 그 어디에도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이 거론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53년 10월 3차 협상에서 일본의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 외무성 참여는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통해 한반도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주장(‘구보타 망언’)을 펴 협상은 57년까지 열리지 못했다. 이뿐 아니라 일본 측은 한국의 식민지 배상 문제와 관련하여 패전 후 한반도에 두고 온 일본인들의 재산 반환을 요구하기도 했다.
강공세의 일본이 자세를 누그러뜨리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특히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됨에 따라 역내에서 미국의 배후 동맹 필요성이 거론되고 이를 위한 전제로서 한·일 관계 개선 압박이 확산되면서부터다. 흔히 대일청구권자금 유·무상 5억 달러 결정은 김종필·오히라 회담으로 이뤄졌다는 세간의 주장이 있으나 이는 60년대의 동아시아 상황, 5·16 군사정부의 초조함 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그저 그런 무용담에 불과하다.
결국 수교 협정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과 배상이 아니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위축됐다. 50주년을 돌아보며 총체적인 평가를 내리기에는 조심스럽지만 수교 협상에 핵심이 빠져 있었다는 점은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세계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국 이기주의로 작동되는 만큼 미국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일본을 향한 묻지마 식 증오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강대국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남기를 원한다면.
조용래 편집인 jubilee@kmib.co.kr
[조용래 칼럼] 한·일 수교 50년-강대국에 휘둘리다
입력 2015-06-08 0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