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 시약소는 윌리엄 스크랜턴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곳이었다. 그는 1890년 10월 남대문 시약소를 개설할 때부터, 장차 종합병원과 의학교를 설립해 ‘감리교 의료선교 기지’로 육성하려 계획했다. 그만큼 주변이 조건이 월등히 좋았다. 서울 시민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남대문시장 한복판이라는 위치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비교적 안전한 ‘외국인 거주지’ 정동을 포기하고 치안이 불안한 남대문 시장거리로 병원을 이전하려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여리고 골짜기에서
하지만 스크랜턴의 의지는 분명했다. ‘민중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궁(경운궁)과 외국공사관, 양반 저택들로 둘러싸인 정동을 떠나 ‘여리고 골짜기’를 택했다. 이런 스크랜턴의 계획을 선교본부도 승인했다. 그는 1893년 봄부터 남대문 시약소 안에 있던 한옥 건물을 병원 시설로 수리하고 정동에 있던 시설과 장비를 옮겨 1895년 봄부터 상동에서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했다. 정동의 ‘시병원’ 간판이 상동으로 옮겨진 것은 물론이다.
스크랜턴은 주일 집회도 시작했다. 남대문 시약소 부지 안에 있던 한옥 한 채를 예배실로 꾸몄다. 그는 거기서 ‘목사’로서의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목회는 쉽지 않았다. 이에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메리 스크랜턴은 아들의 상동 목회에 동참했다. 그녀는 1894년 봄, 남대문 안에 집을 한 채 마련해 아예 거처를 옮겼다. 그러자 한국인 여성들이 낯선 외국인을 보기 위해 찾아왔고 여성들은 차츰 교회에 나와 신앙을 갖게 되었다. 후배 선교사 힐먼은 “남자 5명으로 출발한 교회에 부인들이 오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크랜턴 부인이 머문 뒤 오기 시작했다. 교회는 여성 교인들로 차고 넘쳤다”고 증언했다.
메리 스크랜턴은 집에 찾아오는 손님만 맞이한 것은 아니었다. 전도부인을 대동하고 남대문 시장 주변 부인들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해서 얻은 교인 가운데는 ‘송씨 집안’ 사람들도 있었다. 1895년 11월 그 집안에서 10살짜리 남아와 그의 고조할머니가 함께 세례를 받음으로 송씨 집안 5대가 한 교회에 출석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이런 교인들로 상동교회는 급성장을 이루었다. 윌리엄 스크랜턴은 1년 후 미국 선교부에 “지금은 100명이 추가됐고 현재도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여기 교인들은 1000명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교회를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상동교회 신자들의 기도는 이루어졌다. 스크랜턴 부인이 개인 돈으로 부지를 마련했다. 부지는 남대문 시약소 건너편 언덕의 ‘달성위궁 저택’이었다. 달성위궁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판중추부사를 지낸 서경주(1579∼1643)의 집이었다. 서경주는 선조의 딸인 정신옹주와 결혼해 부마(임금의 사위)가 되면서 ‘달성위(達成尉)’에 봉해짐으로 그의 집도 ‘달성위궁’으로 불려졌다. 달성위궁은 지금의 남대문로 3가 한국은행 본점 뒤편 언덕에 있었다. 1887년 아펜젤러가 한국인 집회를 위해 구입했던 한옥 ‘벧엘 예배당’에서 돌을 던져 닿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원래는 말 그대로 ‘궁’이었으나 세월이 흘러 규모가 축소되면서 매물로 나온 것을 스크랜턴 부인이 구입한 것이다.
달성위궁은 대략 2478㎡(750평)이었고 부지 안에 큰 기와집 두 채가 있어 하나는 예배당으로, 하나는 매일학교로 사용했다. 스크랜턴은 1895년 5월 말, 예배당 공사에 착수해 한 달 만에 3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조성했다. 예배당은 ‘달성회당’ 또는 ‘달성교회’로 불렸다. 달성회당은 상동교회 부흥과 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1년 만에 교인수는 배로 늘었다. 특히 증가한 여성 신도를 수용할 수 없어 주일마다 마당에 천막을 쳐야 했다.
당시 스크랜턴 모자의 선교와 목회를 도운 걸출한 토착 전도인들이 있었다. 전덕기(1875∼1914)는 상동교회 초기 부흥의 원동력이었다. 그는 영아소동 때 정동 선교사 동네에 돌을 던졌을 정도로 기독교에 반감이 컸으나 17세 때 삼촌의 주선으로 남대문 시약소와 스크랜턴 가정의 일꾼으로 들어가면서 기독교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 스크랜턴 부인으로부터 받은 감화가 남달라 세례를 받았고 상동교회 속장(1898)과 권사(1901년)를 거쳐 1902년 전도사, 1905년 목사가 돼 스크랜턴에 이어 상동교회를 담임했다.
볼드윈 예배당 서다
스크랜턴 모자의 ‘합작 선교’가 빛을 발한 또 다른 곳은 동대문이었다. 메리 스크랜턴은 이곳에 예배당과 시약소 건물을 지었다. 두 건물은 모두 ‘볼드윈’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선교부지 매입 자금과 건축비를 후원한 독지가, 오하이오의 볼드윈 부인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새로 지은 볼드윈 예배당은 벽체는 벽돌로 쌓고 지붕은 조선식 기와로 올린 동서양 절충식이었다. 설교 강단을 제외하고 모든 공간을 반으로 나누어 칸막이를 쳤다. 남녀 자리를 구분한 것이다. 이로써 남녀가 ‘한 지붕 아래서’ 예배를 드리는 첫 예배당이 마련됐다. 아들 스크랜턴은 여기서 남성 교인을 대상으로 교리 공부를 시작했다.
볼드윈 예배당과 볼드윈 시약소는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동대문을 통과해 제일 먼저 보게 되는 ‘명물’이 됐다. 오래지 않아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치료와 영혼구원 사역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동대문 밖으로 나가 자기 고향에 복음을 전했다.
이런 가운데 스크랜턴 집안에 두 가지 경사가 생겼다. 하나는 윌리엄 스크랜턴의 넷째(막내) 딸 헬렌 맥시마가 1893년 11월 11일 태어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메리 스크랜턴의 환갑잔치가 열린 것이다. 환갑잔치는 1893년 12월 9일 남대문 달성위궁 자택에서 열렸다. 이른 아침부터 손님들이 찾아와 선물을 전달했다. 한국 음식을 대접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비롯해 달걀 꾸러미, 은가락지도 있었고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커다란 관(冠)을 만들어오기도 했다. 아펜젤러는 이 광경을 보며 “모두 하나님의 신실한 종에게 표하는 사랑이었다”고 회고했다. 메리 스크랜턴은 한국인들에게 존경받는 ‘대부인(大夫人)’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이덕주 교수(감신대)
[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10) 母子의 남대문·동대문 사역
입력 2015-06-09 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