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편지, 관심 사병 아들을 일으켜 세우다

입력 2015-06-06 00:59
최근 ‘엄마 미안해’를 펴낸 이태원교회 김명옥 사모와 아들 임종인씨가 3일 오전 서울 중구 삼일대로 남산공원에서 ‘쫄병백서’를 주제로 얘기하면서 활짝 웃고 있다. 전호광 인턴기자
삽화는 종인씨 여동생 소영씨가 그린 '오빠와 엄마'.
유격훈련을 마치고 산길을 뱅글뱅글 돌다가 비로소 저수지 옆에서 휴식을 취했다. 실낱같은 바람이 방탄모 위를 훑고 지나갔다. 적막한 저수지에서 아주 작게 물거품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라도 한 줄기 내릴 것 같은 하늘을 보니 글 한 토막이 생각났다. 비를 ‘하나님의 눈물’로 그려낸 고(故) 권정생 선생의 동화였다. 옆에 누워버린 선임병에게 말을 건넸다.

“비가 내리면 마른 땅에 딱 닿는 첫 방울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

“다른 물방울보다 앞서서 맨 처음으로 땅을 적시는 1등 물방울 말입니다.”

“어, 그게 왜.”

“그거 하나님의 눈물방울일지도 모릅니다. 땅이 그동안 지치고 고생했다고 위로하고 적셔주는 그 첫 빗방울은, 연민 섞인 하나님의 눈물일지도 모릅니다.”

“…하아, 미친×.”

결국 그날 밤은 ‘고난의 행군’이 됐다. 여기저기 구멍 나고 썩은 우비를 뒤집어쓰고 앞이 보이지 않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2년 전 제대한 뒤 모친과 함께 ‘엄마 미안해’(엄마 김명옥, 아들 임종인 지음·해피데이)를 최근 출간한 임종인(26)씨가 현역 시절 겪은 이야기 한 토막이다.

잘 생긴 명문대생 ‘교회 오빠’였던 임씨가 군대에 가서 ‘관심 사병’이 됐다. 총기난사 사건의 또 다른 임 병장이 될 수도 있었던 그를 무장해제시켰던 것은 엄마의 손편지였다. 엄마는 아들이 무엇을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궁금했다. 아들은 어떻게 잘 살아남을지 고민했다. 민간인 나라와 군인 나라 사이를 오간 221통의 편지에는 엄마와 아들이 21개월을 버텨낸 비결이 담겨 있다.



내 아들이 관심 사병이라니요?

한겨울 깊은 밤에 느닷없는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나 숨이 막혀요….”

“왜? 무슨 일인데?”

“….”

“너, 똑바로 말해봐! 구타당하는 거 맞지?”

수화기 너머로 목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쳤고, 손가락 마디 끝까지 전율이 일었다.

“잘 견딜게요. 엄마 목소리라도 들으면 힘이 날 것 같아서요.”

주변이 의식되는지 아들은 짧게 ‘작은 조약돌’을 흘렸다. 작은 단서만으로도 아들에게 닥친 버거운 상황이 감지됐다. 아들은 입대한 지 3개월 된 콩쥐 이병이었다. 영하 16도에 맨손으로 얼음물 세차를 했고, 밥 먹다가도 불려가서 면박당하고 폭언을 듣는 일은 일상인 것 같았다. 편지조차도 새벽에 화장실에 가서 읽는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교회에 갑니다

선임 운전병들에겐 운전이 종교였다. 상병 최고참들과 병장들이 툭하면 물었다. “만약, 네가 일요일에 운행을 나가게 되면 운행을 갈래, 교회를 갈래?” 교회 갈 시간에 경계근무가 있으면 힘든 한밤중 근무를 자청하면서까지 교회를 가는 모습을 항상 아니꼽게 보던 그들이었다. 그의 성경책을 들고 사이비 종교 단체를 흉내 내며 조롱하고 웃었다. “운행을 나가겠습니다”라는 대답을 바라는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교회는 가야 합니다.”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욕설이 날아왔다. 돌아온 주일에 그는 결국 교회에 가지 못했다. 햄릿은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했지만 그는 ‘죽을까 죽일까’를 곱씹었다.

그날 밤 그는 엄마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자기 몸을 자기가 스스로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꼭 기억했으면 한다. 폭력에 휘둘리지 않는 여유를 가질 것. 그리고 저항해야 할 때 현명하고 지혜롭게 최선을 다할 것. 그 어떤 순간에도 자기 한 몸 건사하는 것이, 끝까지 버티고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순간적인 분노는 눈 녹듯이 사라지고 그는 냄새나는 침낭 속에서 이를 악물고 잠을 청했다. 부대 안에서는 괴롭힘을 당했지만 부대 밖에서는 언제나 위로를 건네는 가족이 있었다. 따뜻한 집이 있었고, 군 목사님과 교회 식구들로부터 많은 격려의 편지를 받았다.

3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이태원교회(임일우 목사)에서 만난 김명옥(53) 사모는 아들이 무사히 제대해 가정으로 돌아왔지만 맘 놓고 웃지 못했다. 김 사모는 최근 입대 3일 만에 고참 병사의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수류탄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밝혀진 ‘우수 전투병’ 소식에 몸서리를 쳤다. “엄마가 미안합니다. 내 아들만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남의 아들들이라도 함께 지켜내지 못한 이 땅의 모든 엄마들이 잘못한 겁니다. 사실 책 제목은 ‘엄마가 미안해’라고 쓰고 싶었어요.”

올여름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는 아들 임씨는 그런 엄마의 손을 잡고 굵은 목소리로 “엄마 미안해”라는 말을 남기고 캠퍼스로 향했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