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모(1949)의 조각 작품을 만난 것은 1980년대 초인 것으로 기억된다. 그 무렵 대학가는 변혁의 몸부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껍데기는 가라’라는 구호 아래 신군부로 상징되는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화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것이었다. 그 화사한 캠퍼스의 벚꽃아래 숨 막히게 터져 나오는 최루탄은 대학 교수들의 설자리를 무색케 했다. 강의실은 텅 비고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가려는 대결만이 계속되고 있었다.
나의 우울한 발길은 당시 화랑들이 집결해 있던 인사동으로 향했고, 이는 내게 어쩌면 피할 수 없는 탈출구였는지 모른다. 이때 ‘현실과 발언’을 중심으로 민중미술운동이 역사의 여명을 열 듯 힘차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들의 열기 있는 호흡은 내게도 많은 공감을 느끼게 했다. 여과 없이 수입되어 오던 모더니즘이라는, 사생아 같았던 현대미술을 타파하고 우리 그림의 정체성을 찾아보자는 도전이자 미술의 각성이었다.
그 언저리에 30대 초반의 홍순모가 있었다. 그의 작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짓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등의 작품은 고뇌 속에 방황하는 나의 감성을 짙게 흔들어 놓았다. 요컨대 카타르시스와 위로가 있었다.
노동의 순수성을 찬양하던 데서 출발한 민중미술이 홍순모에게는 주님의 사랑과 위로를 절규하듯 바라보는 소외자로 환치되고 있었다. 이는 당시 통념적 민중미술의 접근과는 다른 것이었고, 이거야말로 인간의 아픔과 소외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진정한 의미의 인간 회복의 시각이었다. 그분의 눈으로 바라볼 때만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좌절당해온 민초들의 참 아픔과 소망을 직시할 수 있음을 작가 홍순모는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그의 ‘하나님께서 세상에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은 부끄럽게 하시고’(1988, 무안점토분말)는 이런 홍순모 특유의 작가정신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만큼 그가 살고 있던 시대정신과 역사의 아픔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발이 닳도록 답사하며 찾아낸 무안점토석을 자주 쓰고 있는데, 이 작품에서도 분말을 사용하고 있다. 작품은 매끄럽거나 잘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엉거주춤, 경외와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 있다. 그는 진정 신의 은총이 얼마나 달콤하고 감사한지, 어떠한 손해와 희생도 조용히 감내할 듯한 자세로 그렇게 빈 마음으로 거기 있다. 인물을 매끄럽게 재현시키지 않고, 대상에 매임 없이 자기 식으로 변형시키고 있는 것은 오히려 우리를 감동시키는 요인이다. 이것이 리얼리티, 작가적 진실이 아닐까.
홍순모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예술이 무엇인지 창작의 정신과 자세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그 길을 걸어온 작가다. 그는 근성 있는 프로이면서도 늘 아마추어적 실험과 변혁을 멈추지 않았고, 예술에서 진실의 힘이 무엇인지를 천착한다.
미련한 자에게 진정한 힘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주님의 사랑 체험이다. 지난번 터키·그리스 성지 순례길에서 내 머리를 떠나지 않은 질문이 있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바울로 하여금 고난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게 했던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 대답은 주님이 주신 뜨거운 사랑의 은총에 대한 체험이었으리라 믿는다. 당시 좁은 길을 택한 바울 일행은 미련해 보였을 터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거대 제국 절대권력의 로마를 뿌리로부터 뒤흔들어 기독교 승리의 기틀을 놓지 않았던가. 이런 미련한 자를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역설적인 힘을 홍순모는 이 작품에서 보여주었다.
이석우(겸재정선미술관장, 경희대 명예교수)
[이석우 그림산책] ‘미련한 것들’에게서 소망을 보다
입력 2015-06-06 0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