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을 너무나 사랑했다는 죄목으로 거세당한 남자가 있다. 아벨라르(1079∼1142), 스승인 기욤과 안셀무스를 능가하는 대학자로서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였다. 노트르담 대성당 참사회원 퓔베르는 자신의 질녀인 엘로이즈(1101∼1164)를 아벨라르에게 맡겼다. 그녀는 라틴어와 희랍어, 히브리어에 두루 정통한 재색을 겸비한 요조숙녀였다. 하지만 39세의 가정교사와 17세의 아리따운 제자는 곧바로 정염에 휩싸였다. “철학 공부보다는 사랑의 이야기가 더 많았고, 학문의 설명보다는 입맞춤이 더 빈번했으며, 내 손은 나의 책으로 가는 일보다 더 자주 그녀의 가슴으로 가게 됐던 것”이다.
엘로이즈는 덜컥 임신을 하게 됐고 아벨라르의 고향으로 가 사내아이를 낳았다. 두 사람은 하릴없이 친지 몇 사람을 불러 결혼식까지 올렸지만 아벨라르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하지만 퓔베르는 약속을 어기고 이들의 결혼을 폭로했고 항의하는 엘로이즈에게 도리어 징벌을 가했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보호하기 위해 수녀원으로 보냈지만, 퓔베르는 아벨라르가 사랑이 식자 자신의 조카딸을 수녀로 내몰았다며 가문 모욕죄로 한밤중에 깡패를 동원해 아벨라르의 생식기를 절단하고 말았다. 열렬한 사랑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너무나 어이없이 사그라졌고, 그 이후 수도사와 수녀가 되어 애달픈 사랑을 이어나갔다. 이들의 못다 한 사랑이자 금지된 사랑을 이끌어 준 매체가 된 12통의 서신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800여년 전에 아벨라르와 엘로이즈가 주고받은 연서를 읽어보면 아벨라르보다 엘로이즈의 사랑이 훨씬 더 애절하다. “그 주인, 아니 차라리 그 아버지, 그 남편, 아니 차라리 그 형제인 아벨라르에게. 그의 여종, 아니 차라리 그의 딸인, 그의 아내, 아니 차라리 그의 자매인 엘로이즈로부터.”
서두에서부터 절절하다. “전 세계를 다스린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나에게 결혼의 영예를 바치며, 전 세계를 영구히 지배케 하마고 확약해 준다 해도, 나는 그의 황후로 불리기보다는 당신의 창부로 불리는 편을 더 달갑게 여겼을 것입니다.”
이렇게 뜨거운 연정을 실어온 엘로이즈의 편지에 대한 아벨라르의 답신은 매우 이성적이고 훈계적이다. 서두부터가 경건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복으로부터.”
아벨라르는 자기 몸속에 끓어오르는 정욕의 불을 끄고 온전히 하나님만 사랑하기 위하여 스스로 거세를 단행한 오리게네스를 언급하며 자신의 거세도 순결한 새 옷으로 갈아입히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해석하며, 엘로이즈에게 예전의 애욕의 뿌리를 끊어내고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 살 것을 충고한다. 엘로이즈의 연서가 옛사랑의 추억을 잊지 못한 정한(情恨)으로 가득 차 있는 반면 아벨라르는 남성의 심벌을 잃은 절망과 체념 때문일까. 아벨라르의 서신은 내내 에로스를 뛰어넘어 아가페를 지향하고 있다. 에로스가 남녀간의 정욕적 성애(性愛)라면, 아가페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며 이타적으로 주고 또 주는 신애(神愛)다. 비록 나중이기는 하지만 엘로이즈 역시 에로스가 제아무리 황홀하기로서니 일시적인 애욕일 뿐임을 깨닫고 아가페로 넘어간다.
아벨라르가 먼저 죽자 그의 유언대로 엘로이즈가 원장으로 있던 수녀원에 시신을 매장했다. 22년 후 기이하게도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와 같은 나이인 63세에 죽었다. 그리고 19세기가 되어서야 이 밀레니엄의 연인들은 합장됐다.
“우리들은 바라노니 차라리 연구, 재능, 애정, 불행한 결혼, 그리고 개전(改悛)으로 맺어진 두 사람이 이제는 한결같은 축복 속에서 영원히 맺어지기를.”(파리의 페르 라쉐즈에 있는 묘비명)
김흥규 목사(내리교회)
[시온의 소리-김흥규] 에로스를 넘어 아가페로
입력 2015-06-05 0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