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읍교회-기장장로교회] “백성을 복음 안에서 일깨우라”… 기독운동, 순교 신앙을 낳다

입력 2015-06-06 00:06
일러스트= 정형기 jhk00105@hanmail.net
일제강점기 기장교회(사진 중앙 흰 건물). 교회 왼쪽은 기장읍성 객사, 기장보통학교 건물이다(위). 기장읍성 잔존 성벽. 성곽 안쪽이 기장초교이자 옛 교회터이다(아래).
한 교인이 ‘신천지 설립 반대서명운동’에 동참하며 서명하고 있다(위). 새신자를 맞은 권재완 목사(가운데)가 교회생활을 설명하고 있다(아래).
기장장로교회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울산 방향으로 12㎞쯤 올라가면 부산 기장군 기장읍에 위치한 기장장로교회와 마주한다. 기장역 맞은편에 우뚝하다.

기장교회 현관에 들어서면 한 장의 흑백사진이 오늘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1900년대 초로 추정되는 기장읍내 원경이다. 200∼300호 초가집 가운데로 신작로가 지나고 산 밑으로 기차 선로가 선명하다. 산은 일광산과 양달산이다. 산 아래가 옛 고을 기장읍이다. 기장 동쪽은 봉대산(229m)이 가로막고 있다. 그 산을 넘으면 동해다. 기장미역, 기장멸치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기장은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신작로와 기차역이 전부인 오지였다. 기장 사람들에게 대처는 40리(16㎞)길을 걸어 도달하는 부산의 구도심 동래였다.

이 한 장의 사진을 통해선 조선의 몰락과 일제 침략을 읽어낼 수 있다. 사진에선 팔작지붕 건물과 몇 채의 한옥기와 건물을 볼 수 있다. 그 한옥 건물은 낮은 성곽이 둘러싸고 있다. 철길과 근대식 벽돌 건물이 없었다면 영락없는 조선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팔작지붕은 기장읍성 객사로 추정된다. 한데 그 객사 옆 경사지붕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경사지붕 건물은 고딕성당의 박공지붕을 흉내낸 듯한 근대건축물이다. 종탑이 눈에 띈다. 교회다.

마을 이장이 목사 되고 순교자 된 교회

기장장로교회.

1905년 호주장로교 왕길지(G Engel) 선교사가 정덕생 조사와 함께 기장 전도에 나서 유봉수 송만룡 정영조 등 수인이 신앙을 갖게 됐다. 이들은 ‘기장면 동부리 328번지 초가 1동을 매입해 예배당으로 사용했다’고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1928년)가 전한다. 당시 교회 이름은 동부리교회였다.

초대 교인들은 교회가 부흥하자 남쪽 송정리에 송정교회를, 동쪽 죽성리에 월전교회(현 죽성교회)를 세웠다. 각기 1907년과 1911년 일이다.

그리고 1922년 기장교회 당회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기선 목사를 강사로 초빙하여 대부흥회를 개최하니 기장의 많은 청년들이 믿기로 작정하고 예배당 건축헌금을 하니 일금 1700원이 갹출되어 이를 기금으로 상기 장소에 목조 함석지붕 31평(102㎡)의 예배당을 건축하다.’

따라서 지금 기장교회 현관에 걸린 대형 흑백사진 속 교회와 기장읍성 전경은 1922년 이후 찍은 사진이라는 얘기가 된다. 기장교회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 1919년 3·1만세운동이라는 역사적 격랑 속에서 민중의 희망이 되어 동부산 지역에 복음을 활발히 전했던 것이다.

동부리교회 모습은 교회와 객사 건물을 담은 또 한 장의 사진에서 시대의 변화를 담았다. 이 사진(아래 흑백)에는 모임지붕을 한 단층 건물이 담겨 있다. 누가 봐도 학교 건물이다. 객사 옆 모임지붕 건물 아래쪽 운동장에선 학생들이 교사에게 지도를 받고 있다. 일제가 식민통치 목적으로 조선교육령을 강제하여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확대해 나갔는데 통상 읍성 최대 건물인 객사를 학교로 사용했다. 그 예를 보여주는 사진이다. 사진 속 교회, 객사 건물은 훗날 헐리고 지금의 기장초등학교 부지 속에 편입된다.

2005년 발행된 ‘기장교회 100년사’ 속엔 주로 1930년대 사진이 실렸다. ‘하기학교 기념’ ‘이일숙 선생 송별 기념’ ‘하기 아동 성경학교 강습회 기념’ ‘이상헌 송옥순 결혼 기념’ 사진 등이다. 목조로 된 동부리교회 현관에서 찍은 것들이 주를 이룬다. 나무종탑 아래서 찍은 기념사진도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사진 찍는 일은 가슴 설레는 신문명과의 만남이었기에 사진 속 아이들은 비록 삼베옷에 고무신을 신었으나 말쑥하다. 처녀 교사는 검정치마와 흰 저고리, 총각 교사는 양복 또는 두루마기 차림이다. 고등과정 혜택을 받은 몇 안 되는 청소년들은 검정교복과 교모를 썼다.

기장교회는 일제 강점기 어떤 우상에도 항거하는 예수 정신이 살아 있는 공동체였다. 권철암 박공표 오기원 장봉기 최창용 최학림 김규엽 등 교회 청년들이 3·1운동을 시장통에서 주도했고 일경에 의해 갖은 박해를 받았다. 이러한 박해에도 기장여자야학교, 기장기독청년회 등과 같은 교육 및 시민운동을 해나갔다. 백성을 복음 안에서 일깨우고자 했다.

이러한 교육과 계몽운동은 일제 말기 순교의 신앙을 낳는다.

최상림 목사(1888∼1945)는 기장교회 출신 목회자다. 주기철 손양원과 함께 경남지역 순교자 세 명에 해당한다. 당시 경남노회 노회장이었던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신사참배에 반대했다. 월전리 구장(이장)이었던 그는 당시 기장면장이었던 박재형(독립운동가 겸 여성 정치가 박순천의 부친)으로부터 복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월전리에서 동부리까지 걸어다니며 교회 출석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1938년 경남노회가 해운대교회에서 열렸다. 신사참배 여부를 앞두고 이를 취급하는 경남노회 교섭위원회가 ‘신사참배는 종교문제와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왕에 절을 하는 것은 국민의례라고 억지를 쓴 것이다.

“교섭위원회의 권고는 노회의 양심에 반한다.” 최 목사는 그렇게 선언하고 노회의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당연히 수난이 뒤따랐다. 투옥됐고 고문당했다. 그리고 5년 만에 평양교도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즐겨 부르던 찬송은 ‘나의 갈 길 다 가도록’이었다.

낮은 복음화율, 이단 득세의 땅에서 부흥

1949년 10월 2일 당회록.

‘이남걸 집사가 헌납한 기장면 대라리 37-4번지 전 212평 지상에 목조기와지붕 건평 33평 예배당을 건축하여 동년 12월 15일 헌당식을 거행하다.’

그 대라리 37-4번지는 지금의 교회 자리다. 흑백사진상 기차역 앞 들판 한가운데다. 이들은 여기에 적벽돌로 쌓은 성전을 마련했다.

2015년 5월 31일 주일. 교회 승합차와 버스에서 내린 교인이 현관 앞 서명대에 줄을 섰다. ‘신천지 설립 반대 서명운동’에 동의하는 이름을 쓰기 위해서다. 부산 기독교인들은 신천지가 부산 연제구에 건물을 세운다는 것을 알고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기장 크리스천들은 이단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1970년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모 사이비 집단이 기장에 수익성 기업을 세워 세력을 확장했던 것이다. 그 세력은 아직도 건재해 기장 복음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기장교회는 여전히 이 지역 모교회다. 700여명이 출석하는 큰 교회다. 기장군은 2000년대 들어 4만명이었던 인구가 11만명으로 급증하면서 기장읍만 해도 50여개 교회가 들어섰다. 그러나 바닷가와 큰 사찰을 끼고 있는 지역 특성상 복음화율은 7% 정도로 낮은 편이다. 전도가 중요한 이유다.

교회는 전교인 성경통독표를 복도에 걸어 두고 말씀을 통한 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로 인해 주일 새 신자 등록이 3∼4가정에 달한 정도로 전도가 활발하다.

이날 권재완 목사는 ‘잠자는 자여 깨어라’라는 말씀을 통해 “사람은 산 자와 죽은 자로 구분되는데 크리스천은 결코 죽은 자가 아니다”며 “대속에 은혜로 살아 있는 우리가 잠들어 있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적으로 죽은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신자된 도리라고 강조했다.

전통 교회가 부흥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기장교회는 전통 교회가 갖는 권위를 벗어냈다. ‘복음을 전파하는 교회’를 비전의 첫 항목으로 꼽았다. 기장 지역 최대 교회로 부흥하는 이유다.

부산=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