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콩쿠르상 작가와 걷는 800㎞ 산책길

입력 2015-06-05 02:45
장 크리스토프 뤼팽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김훈은 여행에세이로도 사랑을 받는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돌며 써낸 ‘자전거여행’은 이 시대 출간된 가장 좋은 여행서 중 하나로 그의 대표 소설 ‘칼의 노래’만큼이나 유명하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여행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보다 여행기를 더 좋아한다는 독자들도 많다.

소설가가 쓴 여행에세이, 문학적 향기와 인문적 사유가 깃든 여행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장 크리스토프 뤼팽(63·사진)이 반가울 수 있겠다.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콩쿠르상을 2001년 수상한 이 소설가의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불멸의 산책’이 초여름 한국을 찾아왔다. 2년 전 프랑스의 여름을 사로잡았던 책이다. 2013년 6월 출간되자마자 30만부가 팔렸고 그 해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책이 됐다.

“처음에는 그저 혼자서 긴 도보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다.” 2010년 세네갈 대사직을 사임함으로써 의사로, 소설가로, 외교관으로 살아온 오랜 공적 생활을 마감한 뤼팽은 도보여행을 계획한다.

“인생이 우리를 가공하고 우리에게 책임과 경험의 짐을 지울수록, 우리가 한 약속과 이룬 성과와 과실들이 만들어 입힌 무거운 의상을 벗어던지고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것은 점점 더 불가능해지는 듯하다.”

그의 도보여행 코스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로 결정된다. 그가 “도보여행”이라고 하지 않고 “긴 도보여행”이라고 했을 때, 또 “무거운 의상을 벗어던지고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것” 어쩌고 하면서 진지한 의미를 그 여행에 부여하고자 했을 때, 그가 가야 할 길은 이미 그 유명한 길로 정해졌는지 모른다.

프랑스-스페인 국경지대에서 출발해 성 야고보의 유해가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까지 800㎞ 넘게 이어지는 산티아고 길은 세계 최고의 도보여행 코스로 꼽힌다.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순례자들이 종교적인 의미로 걸어온 이 길을 오늘날 연간 20만 명 이상이 걷는다. 뤼팽은 “이런 순례자들의 행보는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포스트모던하다”고 썼다.

이 대열 속에는 한국인들도 많다. 국내에 출간된 산티아고 여행서가 수십 권에 이른다. 유럽, 특히 인접한 프랑스에서 산티아고 여행서가 얼마나 많을지 짐작할 수 있다. 넘쳐나는 산티아고 책들 가운데 뤼팽의 책은 왜 베스트셀러가 됐을까? 분명한 것은 유머다. 매우 지적인 유머.

뤼팽은 여행 첫 날 배변 욕구를 다스리지 못하고 불법적이고 망신스러운 방식으로 그 일을 해결한다. “자기 공관에서 하얀 윗옷을 갖춰 입은 열다섯 명의 사람들에게 시중을 받던 대사가,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된 남자가 가장 하찮고도 가장 역겨운 죄를 숨기기 위해 처음 들어간 공원의 나무둥치 사이로 달려가기에 이른 것이다. 원한다면 나를 믿어도 좋다. 그것은 유익한 경험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한 숙소에서 만난 키 작은 남자가 여자 순례객에게 수작을 거는 모습을 관찰하기도 한다. “남자들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웃는 이유가 다양하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한 그는 ‘웃는 여자는 당신 침대에 이미 반쯤 들어와 있다’는 원칙에 매달렸음에 틀림없었다. 젊은 여자 순례자의 폭소에는 매혹보다 조롱이 더 많이 들어 있었다.”

그는 유머를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소품 정도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세속의 복잡성과 양면성을 이해시키고, 의미와 묘사를 보다 정확하게 만들고, 글에 생기와 긴장을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무기로 쓴다.

뤼팽의 글이 보유한 또 하나의 무기는 깊이 숙고하고 짧게 토해내는 사유 또는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들은 원숙하면서도 날카롭고, 사실적이면서도 본질적이다. 유머가 이 책을 대중적으로 성공하게 만들었다면, 통찰은 이 책을 ‘여행기의 교본’이라는 평가에 이르게 했다.

이 책에 나오는 도보여행에 대한 표현들만 봐도 뤼팽의 스타일과 진가를 알기에 충분하다. ‘자아가 자연과 공명하는 순간들’ ‘새로운 상황이 주는 불편과 고통, 동시에 그런 박탈이 주는 행복’ ‘서글픔과 지루함 위로 아주 또렷하게 부각되는 몹시 아름다운 순간들’ ‘차를 몰고 가는 사람들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그런 순간들’ ‘기적이 존재한다고 믿게 하는 그런 종류의 우연’ ‘신을 느끼는 순간, 적어도 신의 숨결이라도 느끼는 시간’….

그렇게 먼 길을 걷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뭘까? 여행이 정말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생생하게 존재한다. 뤼팽은 그걸 쓴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