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의 꽃씨 칼럼] 파도만 보지 말고 바람을 보라

입력 2015-06-03 00:31

‘프랑스의 자살’이라는 책을 아는가. 프랑스 언론인 에릭 제무르가 “68혁명 이후 프랑스는 이슬람, 동성애 등의 문제로 자살의 길을 걷고 있다”는 직격탄을 날리며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다. 68혁명은 ‘금지하는 모든 것을 금지한다’는 구호 아래 정치, 사회, 성적(性的) 금기 등 인간의 삶을 구속하고 있는 모든 것을 깨뜨려야 한다는 문화운동이었다. 68혁명 이데올로기는 영국과 미국에도 흘러가 낙태, 이슬람, 동성애 등 반(反) 기독교적 사상이 번져가는 통로가 되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우리나라에도 이런 바람이 불어와 오는 9일 서울시청 앞에서 동성애 퀴어문화축제를 한다고 하니 이 어찌 개탄스러운 일이 아닌가. 왜 전 세계적으로 동성애라는 파도가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을까. 우리는 동성애라는 파도만 보지 말고 그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의 기원이나 정체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바람은 후기구조주의(Postmodern)로부터 시작한다. 구조주의란 문화 언어 전통이라는 구조가 인간의 이성을 컨트롤한다는 사상이다. 그런데 구조주의시대까지만 해도 어떤 보편적 규범, 가치, 통념 아래서 동일성의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어떤 색다른 주장이나 행동을 하더라도 보편성과 동일성의 범주 안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후기구조주의는 모든 구조를 다 파괴해 버리기 시작했다. 즉 모든 만물과 존재의 차이를 인정하자고 주장하면서 동일성, 보편성, 일반성을 다 해체시켜 버린 것이다. 사실 과거 역사에도 동성애자들은 있었고 성경에서도 동성애는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는 죄라고 언급하며 무서운 징계와 폐해를 경고하고 있다(레 18:22, 20:13, 롬 1:27, 고전 6:9). 그런데 후기구조주의에 와서는 개인 욕구의 차이를 주장하며 욕구를 따라 사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사회적 통념이나 규범이 제어하고 지배해서는 안 된다며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조 속에서 삶의 의지와 행복을 개인의 성적 욕망으로 연결하는 프로이드 심리학이 대중들의 마음을 휘어잡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한 역사의 진보를 외쳤던 마르크시즘과 더불어 사상의 두 축을 이루었다. 그러나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毛澤東)도 실패했고 동구권 공산국가들이 몰락하면서 더 이상 구라파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사상이 되지 못하고 폐기처분될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때 빌헬름 라이히가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드 심리학을 아주 교묘하게 접목하여 네오마르크시즘(Neo Marxism)을 만들었다.

그는 성정치를 주장하면서 가정, 학교, 종교로부터 억압받고 있는 성적 욕망을 해방시켰을 때 새로운 마르크시즘의 세상이 온다고 말한다. 특별히 동성애를 앞세워서 가정의 고정관념부터 깨는 운동을 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어느 진보 정당에 속해 있는 국회의원이 남자끼리든, 여자끼리든 함께 살면 가족으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생활동반자법’을 입법하려고 하고 있다.

이처럼 네오마르크시즘이 추악한 정체를 숨기고 교묘하게 인권이라는 탈을 쓰고 젊은이들에게 다가가니까 동성애를 수긍하고 환호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인권이라는 탈을 쓴 동성애의 가면을 벗기자. 파도만 보지 말고 바람을 보자. 물론 우리가 동성애자들을 증오하고 저주하자는 말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그분들을 여전히 사랑으로 껴안고 치유하고 선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동성애를 확산시키는 퀴어축제나 소수차별금지법의 독소조항 등은 끝까지 반대해야 한다. 영국과 미국 교회도 연합하여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다가 무너지지 않았는가. 이러한 때 한국교회가 더욱 연합하고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 동성애 문제가 당장은 내 교회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팔짱 끼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다면 목회자도 교인들도 죄를 짓는 것이다. 교회는 시대정신을 이끌어가고 역사를 지키는 저항인자요 항체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공익과 자녀들의 건강한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동성애의 흐름을 막고 하나님의 도성을 지키는 거룩한 전사들이 되자. 부디 함께 힘을 모아 바람을 차단해 파도가 소멸되게 하자.

소강석(새에덴교회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