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비자금 용처 규명 없이 처벌 못하는 현실… 조성 자체는 죄가 안돼

입력 2015-06-02 02:08
기업 비자금 수사는 검찰 특별수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비자금은 기업 오너가 회삿돈을 착복하거나 정치인에게 뇌물, 불법 정치자금을 건넬 때 ‘금고’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정관계 로비로 이어지는 기업 수사의 출발선은 항상 비자금이었다. 비자금의 존재를 규명하고 조성에 가담한 사람을 횡령·배임죄로 처벌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수사 방식에 금이 가고 있다. 최근 포스코건설 비자금 수사의 분수령으로 여겨졌던 정동화 전 부회장의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되면서 검찰 수사의 날이 무뎌진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반면 특수검사들은 기업의 비자금 조성·관리 수법이 갈수록 교묘해지는 데 반해 여전히 엄격한 법원의 판례 등이 한계로 작용한다고 입을 모은다. 검찰의 비자금 수사에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비자금 조성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비용을 부풀려 지급한 뒤 차액을 돌려받거나 수익을 축소 계산한 뒤 차액을 따로 받는 방식이 일반적이다. 포스코건설은 협력업체와 거래관계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했고, 경남기업은 ‘현장전도금’ 명목으로 계상된 비용을 비자금으로 썼다.

문제는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것만으로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횡령·배임죄를 적용하려면 비자금의 사용처를 입증해야 한다. 비자금이 기업 오너나 임원의 개인적 이득을 위해 쓰였다는 증명이 필요하다는 것이 법원의 일관된 판례다.

과거에는 압수수색 과정에서 확보한 ‘비밀장부’ 등이 단서가 됐다. 비밀장부에 사용처가 적힌 경우가 많았고, 이를 토대로 관련자들을 추궁할 수 있었다. 다만 회계장부 전산화 등으로 고전적 개념의 비밀장부는 사라진 지 오래다.

검찰의 수사대상이 된 기업들은 이런 점을 교묘하게 파고든다. 비자금을 임직원 경조사비, 복리후생증진 비용, 명절 선물비용 등으로 썼다는 해명은 이제 ‘단골 변론’이 됐다. 개인적 이익이 아니라 회사를 위해 썼기 때문에 횡령·배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4월 D건설사의 비자금 사건에서 관련 임원들은 이런 허점을 공략해 횡령·배임 혐의 대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의 한 간부는 1일 “수사선상에 오른 기업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회사 내 영수증을 죄다 모아서 검찰에 제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각각의 영수증이 실제 비자금 사용내역이 아니라는 점을 일일이 검증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간부는 “여기에 회사의 이익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내부직원의 허위진술까지 더해진다”며 “검찰로서는 비자금 사용처와 관련해 거의 불가능한 입증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셈”이라고 토로했다. 검찰은 지난해 전국 특수부 검사들을 모은 워크숍에서 ‘비자금 조성과 횡령죄’를 주제로 토론하기도 했다.

서울의 한 부장검사는 “비자금 사건에서 피고인이 사용처를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면 불법영득의사를 인정하는 등 입증책임의 주체를 바꾸는 식으로 입법개선, 판례변경 등이 논의돼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