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님, 5분만 시간을 내 주십시오.” 2009년 10월 17일 오후, 강영원(64·사진) 한국석유공사 사장은 토요일인데도 최경환(60) 당시 지식경제부 장관(현재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애타게 찾았다. 사흘 전인 14일 캐나다 정유회사 하베스트 이사회에 인수의향서를 들고 갔다가 “자회사 노스애틀랜틱리파이닝(NARL·날)까지 사줘야 한다”는 부결 통보를 받고 빈손으로 귀국한 길이었다.
장관 면담은 성사됐지만 강 전 사장은 아무런 자료도 들고 있지 못했다. 강 전 사장은 “정유부문을 끼워 인수하지 않겠다면 하베스트 이사회가 팔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라며 황망해 했다. 최 부총리는 “석유공사는 정유사업 경험이 없어 굉장히 위험이 높지 않나” “투자를 결정하는 자문사도 있을 테니 리스크를 잘 감안하라”고 답했다.
강 전 사장은 면담 4일 만인 같은 달 21일 하베스트와 날을 모두 4조6000억원에 인수하는 대형 계약을 체결했다. 최 부총리가 추후 국회에서 회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 석유공사는 날의 가치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석유공사는 이 시기에 하베스트 외에도 콜롬비아 계열 석유회사인 퍼시픽 루비알레스를 물망에 올려둬 ‘투자 대안’도 있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2008년 C등급이던 석유공사의 공공기관 경영평가 등급은 ‘이명박정부 에너지 자원 확보의 쾌거’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2009년 A등급이 됐다.
하지만 하베스트가 애물단지임을 아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노후시설에다 북미 석유시장 불황까지 겹치며 날의 적자는 쌓이기만 했다. 2013년 석유공사 감사실은 하베스트 경영이 허술함을 적발했다. 시추를 마치면 작업내용·결과를 상세 기록한 시추결과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석유공사 매뉴얼이지만, 하베스트는 요약보고서만 작성했다. 재무보고 절차 및 승인권자가 문서화되지 않은 점도 뒤늦게 발견됐다. 그러면서도 하베스트는 부사장 이상 임원에게 임의 지급률에 따라 단기성과급을 지급하고 있었다.
석유공사는 지난해 날을 고작 338억원에 매각했다. 감사원은 지난 1월 석유공사에 총 1조3000억원이 넘는 손실을 끼쳤다며 강 전 사장을 업무상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석유공사 이사회는 지난 3월 ‘유가급락에 따른 하베스트 지원방안’을 의결하기도 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임관혁)는 1일 강 전 사장을 업무상배임 혐의의 피의자로 소환했다. 자원외교 수사에서 기관장급이 소환되기는 처음이다. 검찰은 그를 재소환해 보완조사 할 필요성이 높다고 본다. 현재 배임액수는 날에 대해서만 따진 것이다. 조사 결과에 따라 하베스트 인수액 전체로 확대될 수도 있다는 것이 검찰의 설명이다.
검찰은 석유공사와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들의 진술도 듣고 있다. 인수 당시 자산 가치를 평가한 자문사 메릴린치도 수사선상에 올려 각종 자료를 요청한 상태다. 검찰 관계자는 “세금으로 사업하는 공공기관의 배임 죄질은 민간기업보다 무겁다”며 “과연 사익 추구 없이 국가를 위한 판단이었는지 잘 살피겠다”고 말했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최악 자원외교’ 이면엔 방만 경영 있었다… 석유공사, 자회사 ‘날’ 가치도 모른 채 패키지 매입
입력 2015-06-02 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