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배병우] 씁쓸한 ‘동해병기’ 뒤끝

입력 2015-06-01 00:20

지난해 미국 버지니아주 의회가 공립교과서에 동해와 일본해를 함께 표기하도록 결정한 것은 미국 교민사회의 역량을 보여준 쾌거였다. 이를 계기로 뉴저지주 등 한인이 많이 모여 사는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동해병기법’ 통과를 주도한 시민단체 ‘미주한인의 목소리(VoKA)’ 피터 김 회장 등은 연일 한국 언론의 각광을 받았다. 국민들은 머나 먼 타국에 살면서도 생업을 제쳐놓고 고국의 ‘지명(地名) 지키기’에 나선 교포들에게 감동했다.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법 통과 직후부터 ‘논공행상’을 둘러싼 잡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더 큰 역할을 했다”거나 “누구는 뒷짐 지고 있다 뒤늦게 생색낸다” 등이었다. 그 정도는 봐줄 만했다.

지난해 말 피터 김 회장이 동해병기법 통과의 과정을 기록해 교훈으로 남겨야 한다며 ‘동해병기 백서’를 발간하겠다고 나섰다. 이때부터 몇몇 교민 지도자 간 감정적 대립을 넘어 볼썽사나운 진흙탕 싸움이 됐다.

최근 편집을 완료한 김 회장의 백서에 대해 여러 교민단체들은 김 회장 자신의 역할을 부각한 것을 넘어 다른 한인들의 노력을 폄하한 일방적 기술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버지니아 주도인 리치먼드의 한인회는 이에 반대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했고 워싱턴한인연합회의 린다 한 전 회장은 “오로지 피터 김 회장 본인의 생각과 잣대를 기준으로 서술했다”고 성토했다.

워싱턴한인연합회 측은 별도의 백서를 내겠다고 발표했다. 워싱턴 지역의 다른 한인단체 관계자들도 “특정 단체나 개인이 주도하는 역사 정리 사업은 치우칠 수밖에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백서에 한국 정부와 관련된 민감한 내용이 포함된 것도 논란거리다. 그럼에도 피터 김 회장은 백서를 수정할 생각이 없으며 한국에서 백서를 인쇄해 일정액의 후원금을 받는 조건으로 배포할 예정이라고 한다.

여기에다 동해병기 운동에 힘을 보탠 버지니아한인회 전 회장의 부실한 재정운용 의혹도 불거졌다. 버지니아한인회의 새 집행부는 홍일송 전 회장이 재임 중 약 40만 달러로 추정되는 한인회 재정에 관해 재정보고나 재무감사 등을 전혀 실시하지 않은 채 혼자 관리했으며 최근 3년 동안에는 세무보고를 전혀 하지 않아 한인회가 비영리단체 자격을 상실할 위기에 빠졌다고 밝혔다. 한인회는 홍 전 회장에 대해 직무유기와 공금횡령, 공금유용 등의 혐의로 법적 대응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동해병기법 통과로 한인 풀뿌리 시민운동의 모범을 보였다는 칭송을 받았던 워싱턴 지역 한인사회가 1년도 안 돼 빈축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뉴욕에서는 1개월 가까이 이어지는 ‘한인회장 2명’ 시대가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2명이 회장을 주장하면서 한인 사회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제목으로 뉴욕한인회 사태를 조명했다.

버지니아주 의회의 동해병기법 통과에 대한 고국의 지나친 관심과 칭송이 분란을 부추겼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이 통과한 지 1년 반이 돼 가지만 피터 김 회장은 한국에서 올여름에만 20여건의 강연 요청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피터 김 회장의 ‘백서’를 둘러싼 양측의 이전투구 식 주장이 미 주류 언론에 보도될 경우 한인 사회의 위신 추락은 물론 민감한 외교적 사안으로 비화될 수 있다. ‘동해병기법 쾌거’가 ‘동해병기법 파국’이 되지 않도록 교민 지도자들의 자제와 자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워싱턴=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