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9) 제2기 선교 사역의 확장

입력 2015-06-02 00:00
1894년 당시 미 감리회 소속 선교사들은 새로운 진용을 갖춰 사역에 임하고 있었다(위쪽). 앞서 1893년 4월에는 미 감리회 해외여선교회 기관지인 ‘Heathen Woman’s Friend’에 이화학당 특집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다. 이덕주 교수 제공

1892년 5월 21일 윌리엄 스크랜턴 가족은 1년 휴가를 마치고 귀환했다.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스크랜턴은 한층 성숙한 신앙과 선교의식을 갖고 사역에 임했다. 당시 선교사 진용에도 변화가 있었다. 1893년에 이르러 미 감리회 한국선교회는 해외선교부(남선교부) 소속 윌리엄 스크랜턴과 아펜젤러 존스 홀 노블 헐버트 버스티드 등 6가정 부부 12명과, 해외여선교회(여선교부) 소속 메리 스크랜턴과 로드 와일러 루이스 페인 커틀러 프라이 해리스 등 7명을 합쳐 모두 13가정, 19명(자녀 제외) 등으로 구성됐다.



쟁기와 써레 이론 제시



스크랜턴 가족이 돌아오자 아펜젤러가 휴가를 떠났다. 이에 미 감리회는 스크랜턴을 한국선교회 관리자 직책으로 임명했다. 선교 관리자는 토착교인에게 ‘장로사(長老司)’로 불렸는데 선교사들이 참여하는 선교회뿐 아니라 토착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을 관리하는 선교지의 최고 행정 책임자였다. 스크랜턴은 장로사로서 한국에서 전개되는 선교 사역 전반을 현장에서 지휘, 관리하면서 서울 지역 의료사역을 겸했다. 정동 시병원뿐 아니라 맥길이 맡았던 남대문시약소와 폐쇄되었던 애오개시약소, 그리고 새로 시작하는 동대문시약소까지 담당하게 된 것이다.

스크랜턴으로서는 시병원과 시약소를 통해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 구상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계층에 대한 그의 선교적 관심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복음전도를 지향했다. 의료사역은 복음전도를 위해 길을 열고 터를 닦는 예비 작업이었다. 그의 이 같은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스크랜턴은 안식년 이전까지 가급적 설교와 집회 인도, 성례 같은 종교 사역은 아펜젤러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아펜젤러의 복음전도 사역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데 만족했다. 그러나 휴가 이후 스크랜턴은 병원에서 매일 열리는 기도회와 설교를 인도했다. 의사로서 진료활동에 집중했던 사역의 경계를 넘어 ‘목사’로서의 사역에도 적극 가담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태도는 예상 밖의 열매에서 비롯됐다.

배재학당 출신으로 아펜젤러에게 세례를 받았던 한용경은 1886년 시병원 설립 때부터 한결같은 믿음으로 스크랜턴의 병원 사역을 도왔다. 한용경은 스크랜턴이 안식년 휴가를 떠난 사이에도 병원을 지키며 병원 조수이자 복음 전도자로서 역할을 감당했다. 모든 환자가 병원에서 그를 만나야 했고 그에게 약만 타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도 함께 받았다. 스크랜턴은 이렇게 병원에서 한용경에게 복음을 듣고 고향에 돌아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20명은 넘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러한 결과에 힘을 얻은 스크랜턴은 연회에 참석한 동료 선교사들에게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뿌려진 씨의 열매를 추수하기 위해 “서울에 앉아만 있지 말고 이제 일어나 지방으로 흩어져 나가자”고 호소했다. 그는 서울에 국한됐던 선교 영역을 지방으로 확장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리하여 선교회는 1892년 인천에 존스, 평양에 홀, 원산에 맥길을 각각 개척 선교사로 파송했고 청주와 공주 수원 대구 의주 등을 선교 후보지로 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1년 후 스크랜턴은 매년회 장로사 보고에서 다시 한번 의료 사역이 “사람들의 편견을 허물어뜨리고 인습을 깨뜨리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선교이론으로서 복음 사역의 전제로 의료와 교육이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쟁기와 써레 이론’을 제시했다. 병원이 사람들의 편견을 허무는 쟁기라면 학교는 땅을 부드럽게 만드는 써레였다. 씨를 뿌리기 위해 땅을 골고루 부드럽게 만드는 써레보다 굳은 땅을 갈아엎는 쟁기가 먼저 필요했다. 그는 의료→교육→목회로 이어지는 선교의 ‘삼각구조’ 안에서 세 분야 선교사들이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상호 협력하기를 기대했다.



개척 위해 이화학당 교장직 물러나



한편 이화학당과 여선교부 한국인 교사와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신앙집회를 유지했다. 여선교부 직원 기도회를 주도한 인물은 바로 1887년 봄 고종 황제가 이화학당에 사액현판과 함께 내려 보낸 병사, 기수(旗手)였다. 직업 군인 기수는 처음엔 명령에 따라 정동 여선교부로 출근해 이화학당과 스크랜턴 부인, 여선교사를 보호하는 직책을 수행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살림살이를 도왔고 마침내 마음이 열리며 복음을 받아들였다. 메리 스크랜턴은 기도회 때마다 말씀을 정확히 풀어내는 기수의 믿음에 감탄했다.

주변에서는 이런 기수를 정식 전도인으로 채용해 지방으로 보낼 것을 권했으나 군인 신분인 그를 종교 활동에 투입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고, 남성 전도인 임명과 파송은 남선교부 권한이어서 스크랜턴 부인이 나설 문제가 아니라 봤다. 무엇보다 ‘여성이 여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여성전도인 양성이 더 시급했다. 그럴 즈음 학생과 교인들의 신앙 수준은 눈에 띄게 발전했고 1892년 8월 매년회에서는 여성 신도 20명이 단체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이화학당을 졸업한 여성들 중에 몇 명은 사역자로서의 길을 걸어갔다.

‘점동이’ 에스더의 경우는 스크랜턴에게 영어와 성경을 배웠고 셔우드(나중에 홀 부인이 됨)에게 기초 의학을 배운 후 보구여관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에스더는 1893년 홀 부부가 평양 선교사를 떠나면서 전도인으로 동행하게 된다. 이후 한국 최초의 여성의사가 됐다. 이화학당의 영구학생 ‘꽃님이’ 애니도 전도사와 결혼해 남편과 함께 목회 사역을 했다. 이들은 선교사에게 배운 지식과 신앙을 이웃 여성들에게 전하고 나눴다.

메리 스크랜턴은 1893년 9월 이화학당 교장직을 24세인 페인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새로 개척한 남대문과 동대문 지역 선교, 전도부인 양성에 전념키로 했다. 개척 7년 만에 안정적 환경과 기반을 구축한 그는 여생을 후배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지낼 수 있었음에도 개척을 위해 자리를 옮긴 것이다. 부인의 나이 61세였다.

이덕주 교수(감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