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구의 영화산책] 한국사회, 분노와 복수의 영화에 빠지다

입력 2015-05-30 00:32
'와일드 테일즈:참을 수 없는 순간'의 한 장면.
강진구 교수·영화평론가
여객기에 탄 승객들은 서로에 대해서 알지 못했지만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가브리엘 파스테르나크에게 크든 작든 상처를 준 일이 있었다는 것. 그가 쓴 논문에 망신을 준 사람이거나 어릴 때 그를 괴롭혔던 사람, 손님들과 문제가 많다고 그를 해고했던 사람 등 그를 화나게 만든 사람 모두가 무료 티켓으로 같은 비행기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할 무렵 겁에 질린 스튜어디스가 말을 이었다. “파스테르나크는 이 비행기의 기장이에요. 비행 훈련을 같이 받았는데, 저한테 데이트 신청을 하길래 거절했어요. 그런데 지금 큰 일 났어요. 조종석 문이 잠겼어요.” 여객기는 지상에 있는 파스테르나크의 부모를 향해 곤두박질쳤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데미안 스지프론 감독이 만든 최신작 ‘와일드 테일즈:참을 수 없는 순간’은 ‘분노’라는 주제를 가지고 각각 6개의 다른 이야기를 꾸며낸 옴니버스 영화다. 자신이 모는 고급승용차를 가로막은 고물자동차 운전자에게 욕을 하고 지나가지만 이내 타이어가 펑크 나는 바람에 복수를 당하는 상황이나 불법주차가 아니었음에도 견인되어 낭패를 보게 되는 사람이 벌이는 복수극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법한 상황을 전개시켜서 관객들의 공감을 얻는데 성공했다. 분노를 유발하는 익숙한 상황과 이에 대해 복수로 응징하려는 현대인의 심리를 이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할리우드는 현대인이 분노하는 상황과 복수의 심리를 상업적으로 이용한지 이미 오래다. 금년 한국 극장가를 장악한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내용과 제목 모두가 분노와 복수를 다루고 있지 아니한가. ‘분노의 질주:더 세븐’(Fast and Furious 7)의 영어제목에는 ‘격로한’의 의미를 가진 ‘퓨리어스’(Furious)가 등장하는가 하면,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어벤져스’(Avengers)는 복수자를 뜻한다. ‘어벤져스’의 뒤를 이어 극장가를 장악한 ‘매드 맥스: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 역시 암울한 미래의 세계를 배경으로 분노와 응징의 카체이싱(자동차 추격)이 펼쳐진다. 이 영화의 사령관으로 나오는 여자주인공의 이름 또한 분노라는 뜻의 스페인어 퓨리오사(Furiosa)다.

분노와 복수를 다룬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분노가 만연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영화가 거울처럼 비춰주기 때문이다. 집단따돌림을 이기지 못하고 총기를 난사해 동료 5명을 살해한 임병장 사건이나, 아파트 층간소음으로 인한 다툼 끝에 형제를 살해한 사건, 음주운전에 적발된 50대 남성이 차량에 가스통을 싣고 파출소로 돌진해 숨진 사건 등은 분노조절에 실패한 주인공이 벌이는 활극처럼 느껴진다. 영화를 통해 자신이 처한 현실사회의 분노상황을 떠올린 현대인에게 복수극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분노의 뜻을 지닌 ‘퓨리’(Fury)란 단순한 화를 표출하는 것이 아닌 맹렬한 공격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이 원수에게 행하는 ‘진노’를 표현할 때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사66:14). 그러나 놀랍게도 분노를 대하는 하나님의 자세는 영화 속 주인공과는 다르다. 첫째, 오래 참음과 관용이(롬9:22) 먼저이고 둘째, 긍휼과 돌이킴은 하나님이 분노를 처리하는 방식이다(시78:38).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직접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말씀하신 사실이다(롬12:19). 이유는? 영화적 상상력을 동원하자면 하나님의 진노가 더 무서우니까.

(고신대 국제문화선교학과교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