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기사님, 그게 왜 안 되냐고요?”
“미스 손, 현장 실정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현실적으로 주문 소화하기 불가능하다니까요.”
“아 알았어요. 알았어!”
“내 참….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내가 참아야지.”
1980년대 중반 충남 예산군 예산읍 제일사료주식회사 사무실. 20대 직장인 남녀 둘이 언성을 높입니다. 이 회사 사료 배달기사 지경섭군과 경리 손예신양입니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성격의 지군과 숫자 하나 틀린 것에도 밤을 꼬박 새며 맞춰야 하는 세심한 성격의 손양은 첨부터 ‘톰과 제리’처럼 으르렁댔습니다.
지군은 넉넉한 집 자제였으나 손 큰 아버지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고생 꽤나 하고 있었죠. 예산농전(현 공주대학)을 졸업한 허우대 듬직한 청년이었습니다. 손양은 예산여고를 졸업했습니다. 예산을 벗어나본 일이 없는 사랑 가득한 가정의 처녀였습니다.
두 사람은 기독청년이었습니다.
지군은 예산장로교회를, 손양은 예산구세군교회를 섬겼죠. 그렇다면 ‘형제자매님’으로 더없이 좋은 관계여야 하는데 실상은 퉁 놓기 바쁘네요. 대체 이들 왜 이럴까요. 그냥 ‘내 스타일’이 아니었던 걸까요.
한데 어느 날입니다. 지군이 교회 청년부 야유회를 가게 됐습니다. 파트너가 필요했죠. 지군은 손양에게 친구를 소개시켜 달라고 부탁합니다. 손양 발끈합니다.
“아니 지 기사님, 주제를 아세요. 누가 지 기사님과 같은 분 파트너 하려 하겠어요? 저는 소개해줄 사람 없어요!”
손양은 필요 이상 화를 냅니다. ‘아니 소개 안 시켜 주면 그만이지 왜 저렇게 화를 내나. 성질 별나네.’ 지군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한 직장 ‘톰과 제리’가 부부된 사연
“남편에게 그 얘기 듣는 순간 자존심이 너무 상하더라고요. ‘싸우다 정든다’는 말이 딱 맞아요.”
그 ‘톰과 제리’가 예산군의 스타이자 NGO 월드비전의 스타이기도 한 지경섭(55·지명영농조합법인 대표) 손예신(52·제일사료대리점 대표) 부부입니다. 기독청년이었던 그들은 지금 예산 죽림감리교회 집사·권사 직분으로 하나님께 충성하죠. 부부가 스타인 이유가 있죠. 성경 가르침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퍼주기 때문입니다. 부부를 알 수 있는 지역 신문 헤드라인입니다.
‘해외·국내 아동 22명 후원하는 지경섭 지명농장 대표’ ‘양돈 삼형제의 뜨거운 이웃사랑 지경섭·진섭·복섭 형제 사랑의 쌀 기탁’ ‘기부천사 지경섭씨 명절 맞아 불우이웃에 돼지고기 기탁’ ‘손예신 대표 재능나눔 공간 희망창고 기증’.
2015년 5월 현재 부부가 돕는 아동은 28명. 멀리 아프리카 스와질란드에서부터 말라위, 잠비아, 케냐, 인도, 방글라데시, 라오스, 몽골 등의 어린이 및 청소년들이 그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중남미 엘살바도르의 안드리아 마라빌라(14) 등도 있네요. 그 스물여덟명 중 한국 어린이는 다섯 명입니다. 한국 어린이들에겐 매월 5만원, 해외 어린이들에겐 매월 3만원을 후원합니다.
그런데 왜 스물여덟명인 줄 아세요? 부부의 결혼 햇수와 같습니다. 따라서 한 해 한 해 더 세월이 쌓일수록 후원자 명단이 늘어나는 거죠. 결혼 50주년인 금혼식 땐 50명의 불우 어린이가 부부의 도움을 받을 듯싶습니다.
이것이 공식적인 부부의 나눔 일상입니다. 이러한 나눔 실천이 큰 부자여서, 또는 자식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부부는 고향 동네에서 청정 사육 돼지농장과 사료 대리점, 돼지고기 전문식당을 하고 있습니다. 시골 살림이라는 게 뻔해서 이웃 숟가락까지 들여다보이는 마당인데 더하고 뺄 것도 없죠. 요즘 조금 사업을 늘려 한우 50여 마리를 키우고 정육점도 운영하는 것이 사업 확장인 셈이죠. 사업하는 사람이 당연히 빚도 있죠.
돼지농장에선 그 유명하다는 예산사과를 하루 1000짝씩 돼지에게 먹입니다. 지역 경제에도 도움 되겠죠. 또 식당 ‘지돈가’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다 보니 지역 농산물 소비량이 많습니다.
부부는 2녀 1남을 두었습니다. 최근 결혼한 큰딸 미소(27)씨, 아들 홍배(26·학생)씨, 딸 은혜(22·학생)씨입니다. 다복하죠. 수제 소시지 전문가인 미소씨는 신랑과 함께 지돈가에서 일합니다. 돼지농장에선 수제 소시지도 생산하거든요.
부부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합니다. ‘생활 신앙 실천’이 부부의 목표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이웃에게 모범이 되는 삶을 실천하자는 게 생활 신앙이죠.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는 말씀을 믿고 따릅니다.
결혼 28년… 햇수만큼 불우아동 후원
앞서 얘기했지만 부부는 사료회사 기사와 경리였습니다. 부자는 아니었던 거죠. 결혼 전 손예신양의 기억입니다.
“소개팅 사건 이후로 친해져 데이트를 하게 됐어요. 유원지에 놀러 갔었죠. 근데 남편이 구걸 장애인에게 1000원짜리를 막 나눠줘요. 여럿 됐거든요. 제가 그렇게 도와줘봤자 힘 센 사람들에게 뺏긴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러건 말건 관계없다’고 하더라고요. 참 바른 사람이다 싶으면서도 어이없기도 했어요. 이 사람 평생 믿고 살아도 될까 하는 마음이 있었죠. 어디 가도 결코 빈손으로 가는 법이 없으니까요. 자기 주머니 비더라도 일단 있는 대로 집어줘요. 그 성품은 지금도 같아요.”
손 권사가 남편을 보며 웃음 지었습니다. 머쓱한 지 대표는 "겉멋에 그랬나…" 하고 쑥스러워 합니다. 아내는 남편의 그러한 성품이 평생 갈 줄 몰랐을 겁니다.
결혼 초 부부는 400만원짜리 전세방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마저도 교회 집사님이 우리 부부의 딱한 사정 눈여겨보셨다가 낙찰계 1번 받게 해주어 마련할 수 있었어요. 여섯 번을 이사 다녀야 했어요. 큰애가 유치원에 들어갔는데 원비를 못 낼 지경이었어요. 한데도 남편은 보너스 탄 걸로 친척들에게 줄 선물을 한아름 사왔더라고요."
어려서부터 신앙을 가진 지 대표는 구제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제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죠.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게 될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 지리라'(잠 11:25)는 행위대로 보상해 주는 하나님임을 믿었습니다.
"어느 날 세 아이가 '오뎅(어묵)'을 사달라고 졸랐어요. 그런데 그거 하나 사줄 돈이 없더라고요. 아버지로서 참 부끄러웠죠. '안 되겠다. 구제로 하늘에 보화를 쌓기 위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였습니다."
그는 사료회사 지입 차량을 운행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면세(面勢)가 약한 지역의 사료 판매권도 확보해 열심히 일했지요. 부부의 착한 성품을 알고 있는 교인과 주민이 돕기 시작했습니다.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듯(신 28:3) 복이 넘쳤고요.
또 돼지농장을 시작할 때였습니다. 목사님이 축복해주셨죠.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지씨 성을 가진 성도를 위해 '지명'이라는 사업체 이름을 안겨주신 거죠.
농촌교회 대들보 잘못 건드려 '교회 헌당'
그렇게 분주하게 돌아갈 때 부부를 감동시킨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방한일 예산제일감리교회 성도였죠. 현재 예산군청 농정유통과장입니다. 그는 월드비전을 통해 빈곤에 허덕이는 지구촌 어린이들을 후원했습니다. 부부는 그를 멘토 삼아 후원을 시작했습니다. 2000년 중반이었습니다.
부부는 '뜻하지 않게' 교회도 지었습니다. 지 대표가 예산군 대흥면에 제2 돼지농장을 짓고 있을 때 허름한 교회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죽림교회(김진형 목사)였죠. 김 목사는 마을이장 스타일로 목회를 하는 부지런한 일꾼이었습니다. 80세 전후의 노인 30여명이 출석하는 시골교회였죠. 한데 노후한 교회 건물은 바람이 숭숭 들어왔죠. 신발장과 재래식 화장실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고요.
"기왕 축사 짓는 거 교회 불편한 곳도 손봐야겠다 생각했어요. 포크레인 끌고 가 샌드위치패널로 편의시설을 지으려했죠. 한데 포크레인 조작 미숙으로 덜컥 예배당 대들보를 건드리고 말았어요. 본의 아니게 성전건축을 하고 말았습니다. 하하."
지 대표는 어디 가든 후원자 서명 용지를 가지고 다닙니다. 전도인 셈이죠. 취지를 설명하다 보면 하나님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그러니 월드비전 실무자들에게 스타죠. 그는 2012년 충남사회복지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아내, 하나님 위해 쓰는 일이면 'OK'
아내 손예신 권사는 2010년 식당 건물 한쪽을 재능나눔과 생활용품 재판매장을 겸한 공간 '희망창고'로 사용토록 했습니다. 죽림교회 김 목사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죠. 연 1000만원의 수익을 남겨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원봉사자 부족으로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서울, 대전 등서 기부된 물품은 찾는 이가 많았어요. 독거노인, 장애인 가정,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사갔어요. 그분들은 꼭 여러 개를 사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이웃에게 나눠주더라고요. 너무 작은 도시여서 자원봉사자 인원이 달려 이어나가지 못한 게 아쉬워요."
부부의 사업체는 외국인 노동자 등 직원 30여명의 월급을 줄 만큼 커졌습니다. 그럼에도 식당 2층 집 거실을 사무실로 쓰고 있을 만큼 절약하면서 이웃을 돕습니다. '성과 들에서 복 받았다'고 허투로 쓰지 않죠.
부부는 1년에 100여 마리의 돼지를 잡습니다. '가나안 혼인잔치'를 위해 내놓는 거죠. 교회와 마을 행사, 가난한 이들의 경조사 등에 씁니다. 친환경 농법으로 살찌운 돼지니 어디서나 인기입니다.
이번엔 손예신 권사가 결혼 전 남편 말투로 툭 던집니다. "하나님 위해 쓰는 일인데 '그러건 말건' 관계없어요."
예산=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가족행전] 스물여덟 해 부부, 스물여덟 자녀를 품다
입력 2015-05-30 0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