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셀러 ‘완득이’ ‘우아한 거짓말’ 등 청소년 소설로 유명한 김려령(44)의 신작 장편이다. 어른을 위한 소설로는 2013년 ‘너를 봤어’ 이후 두 번째다. 전작에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성의 문제를 들고 나왔던 작가는 이번에도 그 궤도를 달리며 보다 깊숙이 파고든다. 가족을 형성하는, 사랑과 결혼이라는 완강한 제도와 관습을 의심하고 비튼다.
그 방식이 사뭇 일탈적이다. 결혼정보회사 웨딩라이프가 무대다. 여느 회사처럼 싱글과 ‘돌싱’을 연결시켜주는 일을 하지만 이곳 비밀 자회사에선 아내와 남편을 ‘렌탈’해주는 사업도 한다. 와이프팀과 허즈번드팀 직원들은 거액의 회비를 낸 회원들에게 기간제 아내, 기간제 남편으로 파견되어 살아준다. ‘배우자도 임대하는 세상’이 먹히는 이유를 작가는 회사 상무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법적 결혼을 하면 사는 것보다 헤어지는 게 더 복잡하고 피곤하거든. 상대한테 치명적인 실수가 없으면 순탄하게 끝낼 수가 없어.”
소설의 출발은 기존 가족 제도가 유일한 정답인가 하는 문제 제기에 있다. 와이프팀 6년차 차장인 29세 주인공 노인지에게 ‘어머니는 체면 때문에 망부석이 된 사람이고, 아버지는 마땅한 대안이 없어 다시 돌아오는 남편’일 뿐이다.
면접에서 떨어지고 어머니 강권에 첫 사랑과 헤어진 인지에게 이곳은 그래서 망명처다. 벌써 4개의 결혼반지가 있는 그녀는 전 남편으로부터 재결합 신청이 와 다섯 번째 결혼 생활을 하게 된다. 이번에는 첫 ‘출장 결혼’ 때는 보지 못했던 상대에 대한 매력을 서로 찾게 되는데 난데없이 스토커 엄태성이 나타난다. 결혼정보회사에 의해 폭력적으로 격리 당한 그는 남편의 배려로 구출된다. 계약 기간이 끝나는 날, 퇴사를 결심하고 결혼 내내 함께 했던 트렁크도 버리기로 한 노인지의 선택. 배우자 대여 사업 역시 관습에 대한 대안으로는 공허한 거라는 의미일까.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사랑에 대한 통념도 비꼰다. ‘내가 왜 싫다는 거야?’라며 마지막까지도 자신을 거부하는 상대의 감정을 용납하지 못하는 엄태성이 그렇다. 동성애 감정이 좌절당하자 자살을 택한 여고 동창 혜영, 양성애자였던 첫 애인 이야기 등은 독자로 하여금 통념과 실체적 진실 사이를 고민하게 만든다. 답은 없다. 문제 제기를 하는 것에서 소설은 제 역할을 마치려 할 뿐이다.
김려령의 소설은 묘한 마력이 있다. 심리 묘사나 전지적인 해설 없이 대화만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소재 자체도 흥미롭지만 시니컬하면서도 슬픔이 밴 말투, 무릎을 치게 하는 깔끔한 비유, 속도감 있는 문장이 한번 책을 들게 되면 끝까지 읽게 한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책과 길] 사랑과 결혼에 대한 통념 의심하고 비틀어… ‘완득이’의 작가 김려령 신작 장편 ‘트렁크’
입력 2015-05-29 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