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이명희] 아베가 답할 차례다

입력 2015-05-28 00:30

“조선인 위안부의 고통이 일본인 창기의 고통과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일본이 주체가 된 전쟁에 끌려갔을 뿐 아니라 군이 가는 곳마다 끌려다녀야 했던 ‘노예’임에 분명했지만, 동시에 성을 제공해주고 간호해주며 전쟁터로 떠나는 병사를 향해 ‘살아 돌아오라’고 말했던 동지이기도 했다.”

지난해 출간되자마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거센 논란 속에 지난 2월 법원이 판매 금지시킨 ‘제국의 위안부’에 나오는 구절이다. 일각에서는 우리가 마주하지 못했던 ‘불편한 진실’을 파헤쳤다는 평가도 있지만 솔직히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함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던 기억이 있다. 일본 정부나 일본군에 의한 강제동원보다 같은 민족인 조선인 인신매매업자에 의한 ‘매춘’이나 ‘돈벌이’ 목적을 부각시킨 것도 껄끄러웠다.

꽃다운 10, 20대에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 일본군의 ‘성노예’로 살았던,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고향에 돌아와서는 가족들마저 외면하는 고통 속에 죽음보다 더한 삶을 ‘꾸역꾸역’ 살아낸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였다.

새삼 1년 전 기억이 떠오른 것은 며칠 전 “위안부 역사왜곡을 중단하라”며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준엄하게 꾸짖는 일본 역사학자들의 모습을 보면서다. 일본의 16개 역사 연구·교육 단체는 집단성명에서 “강제연행된 위안부의 존재가 많은 사료와 연구에 의해 실증돼 왔다”며 “위안부 여성은 성노예로서, 필설로 다하기 어려운 폭력을 받았다. 성매매의 계약이 있었다고 해도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무시하는 것은 문제의 전체상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아베 총리가 지난달 미국 의회 연설을 앞두고 ‘위안부는 인신매매 희생자’라며 정부와 군의 책임을 회피하고 물타기하려던 꼼수를 비판한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위안부 왜곡은 인권 침해이자 학문 탄압이라고도 했다. “위안부 문제를 외면할 경우 일본이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을 국제적으로 홍보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일본 역사학연구회가 “일본군이 위안부 강제연행에 관여하고 실행한 것은 흔들림 없는 사실”이라는 성명을 발표한 뒤 일본의 ‘용기 있는’ 역사가들을 지지하는 전 세계 역사학자들은 500여명에 달하고 있다. “학자라는 사람들이 다 학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구보 도루 역사학연구회 위원장이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부끄러운 과오를 참회하지 않고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나라에 미래는 없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끊임없이 사과하고 반성해온 독일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러시아와 각을 세우고 있으면서도 얼마 전 전쟁 기간 중 피해를 본 소련군 전쟁포로에게도 배상하기로 했다. 강제 노역자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피해자에서 배상 대상을 확대한 것이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대방 국가가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사과해야 한다”고 했다. 일본군이 위안부 강제동원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공식 문서를 찾아내 1993년의 ‘고노 담화’를 이끌어낸 요시미 요시아키 일본 주오대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를 8만∼20만명으로 추산하며 이 중 조선인 여성비율이 절반을 넘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우리 정부에 공식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37명이다. 생존자는 53명 남았다. 할머니들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죽어서 나비가 되어 온 세상을 날아다니고 싶다는 위안부 할머니들.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면서 “위안부 강제동원 여부에 대한 판단은 역사학계에 맡겨야 한다”고 했던 아베 총리가 이제 답할 차례다.

이명희 국제부장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