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줄을 잘라버려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진짜로 살아 있는 게 아닙니다! (중략) 왜 나와 함께 가지 않나요. (중략) 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중략) 배가 세 번째 고동을 울렸다.”
그리스 크레타섬에서 태어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대목이다.
카잔차키스는 인간의 본질이 곧 자유라며 74세의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자유로운 인간’을 꿈꾸면서 신과 인간, 영혼과 육체, 선과 악, 삶과 죽음의 대척점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그의 ‘자유’는 이 땅에서 순간순간을 온전한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일방적인 규제와 남의 틀 속에서 ‘학습되고 훈련된’ 자유를 벗어나려 했다. 자신의 땀과 피와 눈물, 그리고 온갖 삶의 냄새로 빚어낸 ‘나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투쟁이었다.
종교적 관심에 파묻혀 있던 나의 청년시절, ‘광주의 5월’은 내 삶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엄청난 충격을 몰고 왔다. 그동안 항쟁정신과 대동정신으로 정식화된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지난 35년 동안 내 머리와 심장, 손과 발에게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묻고 있다.
항쟁정신이란 물리력을 가진 국가권력의 불의와 폭압에 맞서거나 인간을 사물화하는 비정상적인 자본권력에 대항하는 민중의 투쟁정신을 말한다. 대동정신은 합법의 탈을 쓴 타락한 정치·경제·문화·종교적 권력에 맞서 인류 공동체적 가치를 연대하며 인간답게 살겠다는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5월이 되면 나를 방문하는 ‘이 손님들’이 뱃고동을 울리며 다시 싸움을 걸어온다.
“이봐요, 그대는 노예가 아니니, 내 앞에서 무릎을 꿇지 마오.”
나를 계속 채근하는 카잔차키스의 호머적 서사시 ‘오디세이아’는 이렇게 자유의 투혼으로 뜨겁다. 자유를 향한 그의 뜨거운 투쟁은 사실 신과 종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오류와 우상을 조롱하는 행동이었다.
그것은 5월의 광주에 대한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의 말처럼, 군대의 실탄사격에도 물러서지 않고 죽음으로 저항함으로써 지배자들의 겁박을 통하지 않게 만든 ‘헤라클레스의 기둥’이었다. 나는 이 자유와 존엄과 자긍심이라는 기둥을 지키며 무릎을 꿇지 않기 위해 내 삶과 충분히 투쟁하고 있는 것인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예수의 말씀은 과연 ‘지금 여기에서’ 자유를 주는 진리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자유를 주는 ‘진리’와 나를 노예로 만들려는 ‘진리의지’는 어떻게 구별하는가.
진리는 스스로가 진리라고 증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홍보용 선전처럼 결코 시끄럽지 않다. 우리는 호교(護敎)적이고 광신적인 ‘진리의지’에 갇혀 그나마 지니고 있던 자유마저 유린된 채 노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간의 육체, 그것은 비록 덧없는 것이지만 조르바처럼 즉흥성의 덧없음에 파묻히기를 거부하며 오히려 덧없음 속에서 존재의 기적과 영원이 번뜩이는 섬광을 발견하고, 끝없이 질문하고 행동하면서 ‘나의 자유’를 꽃피울 수 있는 유일한 시공간이다.
‘멈춤’과 ‘돌아감’이라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의 육체는 창조주 앞에서 감히 ‘대답할 수 있는’ 자기만의 모험과 불굴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 “이봐요, 그대는 노예가 아니니, 내 앞에서 무릎을 꿇지 마오.” 크레타섬에 정박 중인 배가 ‘잠자코 앉아 있는’ 육체를 향해 세 번째 고동을 울린다.
정종성 교수(백석대 기독교학부)
[시온의 소리-정종성] 내 앞에서 무릎 꿇지 마오
입력 2015-05-27 0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