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올린 글 하나가 ‘악몽’의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학생 최모(19·여)씨는 남자친구와 관계가 틀어지자 홧김에 지난 19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글을 올렸다. ‘남자 극혐(오)증이 생겼다’며 격한 욕설과 문구를 적었다.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페이스북 친구’로 한정했다. 글을 본 친구들이 댓글로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지적하자 3시간 만에 삭제했다.
하지만 누군가 최씨의 글을 저장했고, 같은 날 오후 5시쯤 페이스북의 ‘김치녀’(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속어) 페이지에 게재됐다. 페이스북 페이지는 일종의 온라인 커뮤니티다. 네티즌 10만명이 게시글을 받아보는 김치녀 페이지는 주로 여성을 혐오·비하하는 콘텐츠로 꾸며지고 있다. 군복무부터 데이트 비용까지 여러 분야에서 남성이 ‘역차별’당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여성에 대한 증오가 드러난 사진도 수시로 실린다.
지난달 28일 ‘일부 이대생 때문에 이화여대가 남성들로부터 XXX 먹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반발하자 페이지 운영자는 지난 3일 “덕분에 페이지 홍보가 됐다. 욕먹어 가며 이 페이지 홍보해줄 시간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문받고 순국하신 유관순 열사를 위해 묵념이라도 하라”는 글을 남겼다.
최씨는 이 페이지에서 ‘남자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혐오하는 한 여자’로 소개됐다. 운영자는 눈 부위를 가린 최씨의 얼굴 사진과 성(姓)을 가린 이름을 공개했다. 최씨는 순식간에 불특정 다수의 ‘표적’이 됐다. 누군가 최씨의 페이스북 주소를 공개했고, 그의 출신 학교, 친구 등 개인정보도 함께 돌아다녔다. 25일까지 최씨를 겨냥한 댓글 300여개가 달렸다. 대부분은 욕설이었다. 일부는 최씨의 부모를 욕하기도 했다.
최씨는 곧바로 페이지 운영자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글을 지워달라고 했다. 운영자는 “남성 혐오 글을 올린 최씨가 공개사과를 하기 전까진 지워줄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페이스북 페이지는 개인 계정과 달리 운영자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는다.
‘집단폭력’ 앞에서 최씨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국내법이 미치지 않는 페이스북 해외 법인과 인터넷의 익명성 앞에 경찰 등 정부기관도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최씨는 모욕 혐의로 페이지 운영자를 경찰에 고소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피고소인의 신상정보가 필요한데 본사가 미국에 있는 페이스북은 미국법 적용을 받는다. 최씨는 지난 22일 페이스북 본사에 해당 글의 삭제를 요청했다. 페이스북 측은 “커뮤니티 표준을 위반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거절했다. 경찰은 최씨에게 민사소송으로 해결하라고 조언했다.
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는 25일 “페이스북의 운영방침상 허용되는 글이라 삭제되지 않을 경우 방통위에 신고하면 부적절한 내용인지 판단해 국내에서 보이지 않도록 ‘임시 조치’를 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양민철 홍석호 기자 listen@kmib.co.kr
[기획] 증오의 커뮤니티 ‘김치녀’를 어찌하나
입력 2015-05-26 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