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母子가 함께 한국선교 문 연 스크랜턴] (8) 복음전도와 의료선교의 확장

입력 2015-05-26 00:44
윌리엄 스크랜턴이 설립한 시약소가 있던 당시 남대문 모습. 이덕주 교수 제공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조선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문서선교에도 힘썼다. 스크랜턴 부인은 로스역 세례문답서를 서울 말씨로 바꾸어 ‘그리스도 문답’을 펴냈다. 이덕주 교수 제공
스크랜턴가의 선교 사역은 무난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엔 선교부 안에서 문제점들이 노출되면서 내부 시련과 갈등을 빚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선교사들이 한국의 기후와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독신 여선교사들은 풍토와 환경에 취약했다. 1887년 내한했던 로드 와일러가 1년 만에 건강 악화로 떠났고, 보구여관을 맡아보던 하워드도 과로로 건강을 잃고 1889년 말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들을 대신해 여성 의료 선교사인 셔우드는 이듬해인 1890년 10월 내한해 보구여관을 맡았고, 교육 선교사 벵겔은 이화학당을 맡았다.



여성 신앙교육과 번역에 힘쓴 스크랜턴 부인

영아소동 이후 메리 스크랜턴의 여성사역은 체계적인 신앙교육과 전도부인 양성, 교리와 전도문서 번역에 초점을 맞췄다. 이화학당은 여성 선교의 거점이 됐다. 학생 ‘순이’는 스스로 임명한 전도부인이 되어 자기 부모는 물론 병원(보구여관) 직원과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를 본 선교사들은 본격적으로 병원전도 사역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래서 메리 스크랜턴과 셔우드는 이화학당 학생 가운데 간호사 후보생을 선발해 간호지식과 전도 교육을 실시한 후 보구여관에 투입했다.

후보생들은 스크랜턴의 수양딸들이었다. 대표적 인물이 여메레와 이경숙(이드루실라)이다. 후에 한국감리교회 여선교회 모체인 보호여회의 창설 주역이 된 여메레는 경남 마산 출생으로 부모가 메리 스크랜턴에게 ‘버리다시피’ 맡긴 아이로서 지도자로서 역량을 발휘했다. 이경숙은 충남 홍주에서 가난한 선비의 딸로 태어나 10대에 결혼했으나 실패하고 서울에 올라와 바느질과 빨래 일로 연명하던 중 스크랜턴 부인을 만나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경숙은 한글을 깨친 덕분에 이화학당 언문교사로 채용돼 이화학당 최초의 한국인 교사라는 명예를 얻었다.

메리 스크랜턴의 관심은 전도부인 양성으로 옮겨갔다. 이를 위해서는 전도부인 후보자들에게 글과 성경, 기독교 교리를 가르칠 교재와 이들이 현장에 나가서 사용할 한글 전도문서 출판이 시급했다. 한글은 당시까지 천대를 받았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그 우수성을 발견하고 하류 민중계층을 위해 모든 성경과 찬송가, 기독교 문서를 가급적 한글로 인쇄해 사용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400년간 깊은 잠에 빠졌던 한글이 깨어났다.

초기 선교사들은 성경과 쪽복음, 전도 문서를 보급하는데 힘썼다. 전도책자를 무료로 나눠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가급적 돈을 받고 팔려고 했다. 그래야 책과 그 안에 기록된 말씀을 소중하게 여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문서는 주로 ‘성경문답’이나 ‘마가복음’, 로스 번역 신약성경이었다. 성경문답은 메리 스크랜턴이 번역한 것으로 평안도 사투리로 돼 있던 로스의 ‘예수성교문답’을 서울 말씨로 교정한 것이다. 그녀는 또 다른 전도문서인 ‘훈뎇진언’(1891)을 번역, 출판했다. 이는 1865년 중국 상하이에서 간행됐던 아동용 교리 문답서인 ‘訓兒眞言’을 어학선생의 도움을 받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여리고 골짝 같은 곳에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

아들 스크랜턴 역시 정동 시병원을 중심으로 의료 사역에 매진했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 계획을 추진했다. 병원 후보지는 위험과 불편이 도사리고 있는 곳, 그대로 두면 죽을 수밖에 없는 소외계층과 버려진 민중들이 있는 ‘여리고 골짜기’(눅 10:30) 같은 곳이어야 했다. 그래서 중심지보다는 변두리 빈민층들이 사는 지역에 ‘시약소’ 형태로 병원을 운영하려 했다. 오래지 않아 서대문 밖 애오개, 동대문 성벽 안쪽 언덕, 그리고 남대문시장 등 세 곳에 시약소 장소를 발견했다.

애오개 언덕은 조선시대 어려서 죽은 아이나 연고 없는 시체를 묻는 공동묘지가 있었고 골짜기 입구에 전염병 환자를 수용하던 정부기관인 활인서(活人暑)가 있어 일반인들이 접근을 꺼려하는 곳이었다. 스크랜턴은 거기에 작은 한옥을 구입해 시약소로 꾸민 후 1888년 12월부터 진료를 시작했다.

두 번째 후보지는 서울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중 하나인 남대문시장 안에 있는 언덕이었다. 남대문 안에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공물을 수합했던 선혜청(宣惠廳)이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됐고 남대문 밖의 칠패전과 연결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또 상인들과 노동자, 걸인과 부랑인들이 밀집해 있었다. 그는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상동 언덕 부지를 확보하고 종합병원과 의학교 설립 계획을 세워 선교부에 승인을 요청했다. 정동 시병원도 남대문으로 옮겨 ‘감리교 의료선교센터’로 조성하려 했다. 1890년 10월 스크랜턴은 ‘남대문 시약소’를 개설하고 동료 선교사 맥길에게 맡겼다. 세 번째 부지는 동대문 안쪽 성벽 아래 언덕이었다. 갓바치와 백정 같은 천민들이 살고 있었고 상인과 평민들의 왕래가 잦았다. 동대문 시약소는 곧바로 추진되지 못하고 1892년에야 개설됐다.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 계획과 시행은 시병원에 이은 그의 두 번째 선교 업적이었다.



의료선교는 복음 전도의 터를 내는 일

스크랜턴은 의료선교를 마치 울창한 삼림에 들어가 벌채하면서 길을 내고 터를 닦는 작업으로 여겼다. 그렇게 낸 길로 복음전도자들이 들어와 닦아놓은 터 위에 교회를 설립하도록 돕는 것이 의료선교사의 역할로 생각했다. 실제로 서대문 밖 애오개에는 아현교회가, 남대문 시장 한복판은 상동교회, 동대문 성벽 안쪽 언덕에는 동대문교회가 각각 설립됐다.

스크랜턴이 의료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는 외국인을 적대시 하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도 우호적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스크랜턴은 아펜젤러보다 먼저 지방 여행을 시도했는데 외국인이 여행하게 될 경우 여권 격인 호조(護照)를 발급받아야 했다. 개항장 원산, 기근이 들었던 전남 광주를 다녀온 것은 의사였기에 가능했다.

이런 가운데 윌리엄 스크랜턴은 선교사간 갈등과 이견 때문에 어려움을 당했다. 의료선교사 맥길과의 갈등이었다. 맥길은 선교부의 방침을 거부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고민하던 스크랜턴은 맥길에게 남대문 시약소를 맡겼다. 대신 선교보고는 독자적으로 하고 의료선교비도 양쪽에 균등 배분하기로 했다. 스크랜턴의 일방적 양보로 이루어진 타협안이었다. 이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와 심신의 피로가 엄습했다.

이덕주 교수(감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