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한승주] 이재용의 리더십

입력 2015-05-25 00:20

몇 년 전 일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서울 서초구 사옥에 들어섰다. 여느 때처럼 사무실로 향하던 이 회장이 돌연 사내(社內) 어린이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침 아이를 맡기러 온 여직원은 이 회장에게 “시설은 좋지만 자리는 얼마 없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아이를 맡기려면 몇 년씩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들은 이 회장은 당장 “어린이집을 하나 더 만들라”고 지시했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바로 옆 삼성생명 사옥에 어린이집이 하나 생긴 것이다. 한 달에 수억 원이 들어오는 건물 임대료를 생각하면 못할 일이다. 그날 이후 이 회장은 삼성 직원들, 특히 여직원들 사이에선 ‘영웅’이 됐다. 직장 다니며 아이 키우느라 힘들어하는 딸을 도와주는 친정아버지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이 회장은 평소 “능력 있는 여직원들이 육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게 해서는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해 왔다.

위기의식을 강조하는 강렬한 카리스마 속에도 따뜻하게 직원들을 챙겼던 이 회장이 지난해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지 1년이 지났다. 아버지의 뒤에서 늘 몸을 낮춰왔던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최근 공식적인 경영권 승계에 첫걸음을 내딛었다.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문화재단의 신임 이사장으로 선임된 것이다. 창업주인 이병철 선대 회장에 이어 아버지가 맡아온 두 재단의 수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맡고 있던 회장직 3개 중 2개를 맡았으니 ‘삼성의 3세 경영자’로서 공식적인 승계 작업을 시작한 셈이다.

이제 관심은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의 미래를 짊어질 지도자로서 어떤 리더십을 보여줄지에 쏠리고 있다. 이 부회장은 지난 1년간 핵심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는 ‘실용적인 전략가’의 모습을 보여줬다. 방위산업과 화학분야를 한화에 매각하고, 관계사 간 사업 통폐합을 통한 그룹 사업구조를 개편했다.

신수종 사업에서도 성과가 없거나 미래가 불투명한 사업은 과감하게 정리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아직 큰 사업을 독자적으로 맡아서 성공시킬 능력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부회장이 아버지에 버금가는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과제들이 남아 있다. 우선 미래의 삼성을 먹여 살릴 신사업 발굴이다. 삼성전자가 최근 출시한 갤럭시S6의 판매 실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룹 전체적으로 삼성전자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고, ‘스마트폰 이후’를 이끌어갈 새로운 사업 분야도 아직 보이지 않는다. 삼성이 핵심역량을 갖고 있는 사업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는 미래 먹거리를 발굴해야 할 것이다.

또 글로벌 기업에 걸맞은 지배구조를 갖추고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특히 경영권 승계로 인해 이 부회장이 부담하게 될 약 6조원의 상속세를 법이 정하는 대로 투명하고 정당하게 납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란다.

이 부회장이 맞닥뜨릴 시대는 아버지 때와는 전혀 다르다. 고도 성장기였던 1970년대는 산업역군으로서 국가경제를 견인하는 기업의 역할이 시대적 소명이었다. 하지만 2015년은 기업들의 성장보다는 융합, 사회·경제적 갈등 봉합이 요구된다. 소통이 가능한 창의적인 조직, 수평적 기업 문화, 협력업체와의 동반성장도 절실한 시대다. 기업은 커졌고 전 세계적인 도전은 더욱 커졌다. 이 부회장이 우리나라 대표 경제인으로서 새로운 패러다임에 걸맞은 리더십을 보여주길 바란다. 그래서 ‘이재용의 삼성’이 좀 더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이 되길 기대한다.

한승주 산업부 부장대우 sj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