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구의 배반’ 당신은 속았다… 프로야구 2010∼ 2013 시즌 저가 중국산, 국산 둔갑시켜 버젓이 경기

입력 2015-05-23 02:13

1988년 5월 3일, MBC 청룡과 해태 타이거즈의 프로야구 경기가 열린 광주 무등구장. MBC가 6대 5로 앞선 가운데 팽팽히 진행되던 경기는 8회 말 돌연 27분간 중단됐다. 해태 선두타자가 우익선상 2루타를 쳤는데 MBC 선수들이 “공을 보니 해태의 연습구”라며 어필했기 때문이다. MBC 유백만(73) 감독은 KBO(한국야구위원회)의 공인구가 아니면 시합에 쓰일 수 없다고 주장했고, 주심은 결국 이의를 받아들였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공인구의 권위는 이처럼 높다. 공인구의 공신력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2010시즌부터 2013시즌까지의 모든 프로야구 결과는 시비에 휩싸일 수도 있다. 프로야구 출범 후 2013년까지 ‘국내 제조 야구공’만 시합구로 인정했던 KBO가 2010년부터 사기를 당해 중국산 야구공을 공인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22일 서울중앙지검 중요경제범죄조사단에 따르면 야구공 제조 업체 스카이라인, 빅라인, 맥스(현 ILB)는 2010년 초 중국과 대만 업체들의 값싼 야구공을 수입해 ‘메이드 인 차이나’ 스티커만 뜯어냈다. 원산지를 감춰 KBO의 공인구 지정을 받은 뒤엔 KBO 로고와 문구를 공 표면에 인쇄했다. 이렇게 마련된 공인구 아닌 공인구 103만2864개가 2010년부터 지난해 초까지 9개 구단 전체(KT 위즈는 2015시즌부터 1군 페넌트레이스에 참가해 제외)에 납품됐다. 구단마다 한 시즌에 평균 3만개의 공인구를 소비하는 점을 감안하면 팬들이 열광한 야구공 하나하나가 거의 모두 ‘짝퉁’이었던 셈이다.

경기 내용과 결과까지 ‘짝퉁’인 건 아니지만 일구이무(一球二無·공 하나에 다음은 없다)의 절박함으로 공을 대하는 선수들은 더욱 충격을 받은 눈치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가장 많은 공을 던져 210승, 3003이닝, 2048탈삼진을 기록한 송진우(49) KBSN스포츠 해설위원은 “선수들은 KBO가 검증한 공을 믿고 던지고 때렸을 뿐”이라며 “중국산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공인구를 둘러싼 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이번 일을 계기로 KBO가 세부 규정까지 더욱 명확히 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송 해설위원이 말한 논란의 골자는 최근 부쩍 늘어난 타구 비거리다. 방망이 재질이 물푸레나무에서 단풍나무로 바뀐 점, 타자들의 체형이 커지고 기술이 발달한 점 등을 ‘타고투저’ 원인으로 꼽지만 반발력 논란은 계속돼 왔다.

공인구를 납품하던 기존 3사 대표들은 사기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다. KBO 관계자는 “원산지만 속였을 뿐 무게, 반발계수 점검에서 문제가 없던 공들”이라고 밝혔다. 다만 KBO는 논란 불식을 위해 다음 시즌부터 단일구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