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준동] 류현진, 그리고 투수 잔혹사

입력 2015-05-23 00:07

“내가 고교시절엔 연장까지 승부가 안 나면 다음 날 오전에 일어나 다시 마운드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투구 수 개념이 전혀 없었다.”

현역 시절 ‘국보급 투수’로 불렸던 선동열 전 KIA 감독의 회고다. 한국 야구 역사에서 투수 혹사가 어떠했는지 단적으로 대변하는 말이다. ‘야구는 투수놀음’이라고 하지만 감독들은 에이스 투수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다. 감독 눈에는 선수 미래는 안중에 없고 오로지 승리뿐이었다.

고교 야구계는 더했다. 가장 대표적인 선수가 정영일이었다. 광주 진흥고 투수였던 그는 2006년 4월 대통령배 경기고와의 1회전에서 이틀에 걸쳐 무려 242개의 공을 던졌다. 연장전에도 승부가 나지 않은 첫 날 171개, 둘째 날 71개였다. 2개월 후 그는 청룡기대회 경남고와의 결승전에서는 연장 16회까지 222개의 공을 뿌렸다. ‘222개’는 아직도 깨지지 않는 국내 야구 한 선수 하루 최다 투구 수 기록이다. 오죽하면 2007년 당시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국회에서 고교 투수 혹사 문제를 이슈화했겠는가.

프로야구계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최동원은 롯데 시절인 1984년 284⅔이닝을 던지며 27승(13패)을 올렸다. 하이라이트는 그해 한국시리즈(7전4선승제)였다. 5경기에 등판해 4승(1패)을 혼자 챙기며 롯데의 첫 우승을 이끈 것이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바로 ‘무쇠팔’이었다. 이때의 무리한 등판은 최동원의 선수인생을 갉아먹었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김성근식 야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선수들의 혹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류현진(LA 다저스)은 아이러니하게도 동산고 2학년 때 받은 팔꿈치 수술로 인해 혹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국내 프로무대는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만 19세에 한화에 입단한 류현진은 7년간 1269이닝을 책임졌다. ‘괴물’이라는 애칭이 붙었지만 투혼으로 버티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강행군이었다.

2013년 메이저리그에 화려하게 데뷔한 그가 22일(한국시간) 왼쪽 어깨 수술을 받았다. 쉴 틈이 없었던 그의 어깨가 결국 고장난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국내 야구계가 투수 혹사에 대한 참회의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김준동 논설위원 jdkim@kmib.co.kr